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EBS 다큐를 하나 보고 잤다. '나를 찾아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프로였는데 나는 그중에 3부, '시간과 불안'이라는 주제를 봤다.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 아침저녁 혹은 새벽까지 마다하지 않고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그 모습이 대부분의 전형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 찡하면서 공감이 많이 됐다. (EBS 다큐, 나를 찾아라 '시간과 불안' https://www.youtube.com/watch?v=pSOFGy8mN-o)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 6월까지만 해도 스트레스를 팍팍 받아가며 일을 했었고 7월 이후로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고 놀고 먹은지 이제 벌써 8개월이나 됐다. 처음 두달 정도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에 마냥 좋았던 것 같다. 업무의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었다.

작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독일어 공부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6개월정도가 흘렀는데 일은 안하고 놀고 먹는 지금도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른다. 나는 시간을 어떻게는 효율적으로 혹은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현재의 최우선 목표인 '독일어 공부하기'와 부합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죄책감이 쉽게 들어버리곤 한다. 이렇게 되니 쉬고 있는 시간에도 온전히 그 시간을 편하게 보내기가 찝찝하다. 쉬어도 '아 공부해야지. 단어 외워야지' 이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나같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좋아하는 일 하루에 30분씩 하기'가 제시됐다. 일만 하느라 온전히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3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가구 만들기, 복싱하기, 명상하기 등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에 하루 30분의 시간을 투자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취미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찾아보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스스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취미랄 것이 있긴 하나? 하고 자문해봤다. 득이 되는, 삶에 실용성을 높이기 위한 것 말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 때론 쓸데 없어 보이는 활동 말이다. 하루의 일과를 머릿속에 그려봤을 때 그런 활동이 딱히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취미 활동에 서투르다.

예전에 J언니가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어떤 꼬마 소녀가 주변에 있는데, 그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는 자신의 엄마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엄마, 저 오늘 기분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러는데 꽃 한송이만 사서 주시면 안돼요?' 이 아이는 자기가 뭘 했을 때, 혹은 뭘 받았을 때 무엇이 자신을 기분좋게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어린 나이에!)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줄 아는 존재라니. 이 얼마나 멋지고 성숙한 사람인지.

그 얘기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나에게 말을 건다. 무엇이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 무엇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 하지만 역시 바로바로 떠오르진 않는다. 글쎄. 소소하게 지금 하고 있는걸 생각해보면... 이렇게 글을 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마음의 소리를 따라 꼬리를 잡고 글로 옮겨 적었을 때 지면이 빼곡하게 채워지면 그게 마음이 그렇게 풍족할 수 없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내 속에 나오는 얘기들을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산책을 나갈 때. 아무 생각을 안 할수도 있고 혹은 지나가는 것을 관찰하기도 하고. 확실히 기분이 전환된다. 복잡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특효약이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지난 11월 한국에서 배송받은 택배가 꼬이고 꼬여서 여리저기 삽질을 해야 했을 때, 가만히 앉아있다간 미쳐버리겠어서 혼자 조금 걷고 왔더니 답답했던 마음이 풀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페루에서 박군이 보내준 사진. 나는 동물도 좋아한다!!! ㅎㅎㅎㅎㅎ 사진만 봐도 좋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찾아지는 것이 신기하다. 나는 또 서점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꼭 사지는 않아도 빼곡하게 쌓여있는 책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을 생각하면 책과의 인연도 모두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도 좋아한다.

먹을 것으로 얘기하자면 나는 초밥을 먹을 때 한결같은 행복감을 느낀다. 지난 주말에도 같이 B1 수업을 듣는 이탈리아 여자애와 회전초밥집에 가서 초밥을 먹었는데 얘기하느라 감탄을 마저 못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먹는 초밥이라 그렇게 기쁘고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음식은 잘 모르겠는데 초밥 먹었던 기억은 유난히도 생생히 남아있는 걸 보니 그게 나에게 의미가 있긴 하나보다. 작년 독일로 오기 전에 J언니가, 내가 좋아하는 초밥을 마음껏 먹게 해주겠다며 여러번 다른 초밥집에 나를 데려갔었는데, 그때 먹은 초밥의 모양이나 그 행복감이 문득 기억이 날 때면 어김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해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것들이 많겠지. 인생은 이런 것들을 찾아나가는 과정일지 모르겠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행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과정. 열가지 정도 찾아서 리스트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삶이 너무 지치게 느껴질 때는 1번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2번을, 우울해질 때는 3번 옵션을 선택하며 더 좋은 상태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괴롭고 힘든 세상이지만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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