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추천) 안경 - 짐을 내려놓고 좀 쉬자

푸른 에메랄드빛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쏟아지는 햇살과 파도의 넘실거림이 눈과 귀를 가득 채우고 사람들은 사색을 합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이곳을 여행온 사람들은 질릴 때까지 머물고 어떤이는 봄의 기간 동안만 머무릅니다. 영화 <안경>은 만남에 구차한 설명도 없고 여행의 이유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저 머물면서 밥을 함께 먹고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여주지요. 


왜 하필 '안경'일까?

처음에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영화 제목에 주목했습니다. '왜 제목이 안경일까?', '안경이 꽤 중요한 키워드인가 보다'했어요. 그도 그런것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 다섯명 모두 안경을 썼습니다.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안경을 썼구나! 그래서 제목을 <안경>이라고 했을까?' 이런 유치한 추리는 영화에 후반부로 가다보면 어느덧 잊혀집니다. 영화 속 인물이 되어 푸른 바다를 나도 바라보고, 귓가를 가득채우는 바다 소리를 듣고 앉아 있어요. 그러다가 영화의 후반부에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행자가 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실수로 안경을 떨어뜨리는데 그때 갑자기 잊혀져 있던 생각이 수면위로 떠오릅니다. 아, 안경이다! 뭔가 의미심장한데? 그런데 이 사람은 쿨하게 가버려요. 그 안경은 다른 주민이 낚시를 하다가 건져 올리죠. 이거 무슨 의민거지?

많고 많은 제목중에 '안경'을 고른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영화가 마치고 생각해보니 제 질문의 답변은 영화속에 이미 나왔던 것 같아요. 사색도 잘 못하면서 왜 이런 시골로 왔느냐는 질문에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행자가 말하죠. '그러면 안됩니까?', '그 정도 이유면 안됩니까?' 이 질문에 민숙집 주인은 '됩니다'라고 대답하죠. 별이유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감독은 등장인물 다섯명이 모두 안경을 쓰기 때문에 영화 제목을 '안경'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말도 안되는 이유라고 해도 감독이 그렇게 정했다면 그런거죠. 그럴 수 있어요. 안되는건 없는거에요.


장보러 가듯 가벼운 여행 vs. 불편하고 무거운 트렁크를 질질 끌고다니는 여행

넘실대는 에메랄드빛 바다만큼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여행자로 나온 이 여주인공의 짐인데요. 무겁기만하고 불편하게 끌어야 하는 트렁크를 한손에 들면서 온 동네 방네를 지칠때로 지쳐 돌아다닙니다. 죽어라 헛고생을 하는데 짐은 어쩔 수 없이 끌고 다녀요. 해도 어느덧 뉘웃뉘웃 기울어가는데 돌아가야할 숙소는 보이질 않습니다. 지치고 절망적인 순간에 나타난 주민. 말없이 뒤돌아보는 시선에 방어하지 않고 짐을 내려놓습니다. 주민의 도움을 받아 숙소로 돌아오게 되죠.

여주인공을 찾으러 왔던 이 주민은 매년 봄이 시작되면 이곳에 와서 여름이 오기 전까지 머물다가 돌아가요. 마치 장보러 온 사람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긴시간 머물다가 돌아가는거죠. 새삼 양손에 가득가득 짐을챙겨 프놈펜에 입성했던 2월이 떠올랐어요. 지금 돌아보면 한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들만 넘쳐나죠. 미니멀리스트로 살겠네 물건을 많이 소유하지 않겠네 했지만, 저도 역시 불편하고 무거운 트렁크를 버리지도 못하고 불평만 하면서 질질 끌고 다녔던 샘이네요. 그래서 여주인공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전거에 올랐을 때 제 자신도 화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으로 값을 치른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빙수

영화를 보는 내내 빙수 먹으라는 말을 몇번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자주 권하는데도 여주인공은 거절해요. 안좋아한다고. 황소고집이죠. 나같아도 그랬을까? 한 1초동안 생각해봤는데 사실 그럴 것 같기도 하겠더라구요. 저도 사실 팥빙수를 안좋아해요. 팥의 식감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따뜻한 팥죽은 좋아하는데 차가운 팥은 잘 먹지를 못하거든요. 누군가 빙수를 권했다면 저도 안좋아한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을 수도 있겠어요.

이곳 생활에 마음을 열게된 여주인공이 팥빙수를 드디어 받아 먹습니다. 그것도 아주 감탄하면서 맛있게 비워내요. 만든이의 정성을 느꼈나봐요. 아주 신기한게 이 빙수의 값은 마음으로 지불하면 되어요. 어떤 이는 직접 기른 채소를, 어떤 꼬마는 종이접기를, 어떤이는 기타연주를 선물합니다. 오고가는게 화폐보다 확실히 정감이 있네요.


산다는 것

영화를 보는 내내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바쁘게만 살아야하는 우리,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우리, 가만히 있으면 쉽게 불안해지는 우리. 비워낼건 비워내고 무거운건 버려두고,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이요. 

팥을 끓이면서 이렇게 말해요. "중요한 건 조급해 하지 않는 것." 자연스럽게, 또 가볍게, 또 천천히. 오늘과 내일을 충분히 누리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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