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독일어 수업을 마무리하다

굉장한 경험을 했다. 지난 번 어학원 인터네셔널 디너때 아리랑 공연을 인상깊게 봐줬는지 코디네이터가 마지막 수료증 수여 행사 때 다시 한번 노래를 해줄 수 있는지 요청했었다. 피아노도 준비해보겠다며 꽤 적극적으로 나왔고 나도 모처럼 좋은 기회가 온 것 같아서 선뜻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 사이에 일주일이 흘렀고 독일어 인텐시브 코스는 어마어마하게 인텐시브 해졌다. 시험날이 다가올 수록 그룹 분위기도 진지해졌다. A1.1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려울까. 쉽게 나올거라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다.

나름 긴장하며 본 A1.1 시험도 기분좋게 끝이나고 수료증 수여 행사만 남았다. 어떤 곡을 준비하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2곡을 준비했다. 하나는 Mocca의 Happy. 3분 정도의 짧고 경쾌한 곡이다.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라는 가사까지 모두에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선택. 지난번 인터네셔널 디너때 분위기는 정말 열광의 도가니였기 때문에 이번도 그렇게되면 이 곡만 부르고 끝낼 생각이었다.

두 번째 곡은 디즈니 메들리. 내가 좋아하는 5개 곡을 뽑아서 이어놓았다. 길이는 4분 30초쯤. 느리고 서정적인 곡이라 밝은 곡만 하고 끝낼까 싶었다. 주체측에서 피아노까지 준비했는데 3분은 너무 짧은가 싶어 혹시나 준비했는데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고나서 내가 정말 당황스러웠던 것은 어디를 둘러봐도 피아노가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왜 일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당연하게 피아노를 키보드로 생각했었다. 움직일 수 있는게 당연하니까 코디네이터가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하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 * *

알고보니 피아노는 행사가 열리는 공간 아래 층 홀에 있었다. 수료증을 나눠주는 행사를 마치고 식사를 한 후에 모든 학생들과 선생님이 우르르 아래 층으로 노래를 듣기 위해 이동해야만 하는 그런 구조였다.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로지 내 노래를 듣기 위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간다고라. 왓 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말도 안된다.

왜 이런. 도대체. 피아노가 업라이트인데 이걸 알고도 계획한 코디네이터는 무슨 생각인지. 소리를 체크하기 위해 홀로 이동하는데 동행해준 스텝은 걱정말라고 나를 다독여줬다. "다들 내려와서 들을만 해요. 충분해요." 흑..

업라이트 피아노를 치는 것도 오랜만인데 홀이 크고 울려서 더 당황했다. 공연홀에서 노래 부르는 건 처음 같은데. 다리가 후들후들 심장이 벌렁벌렁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온다. 리허설로 혼자 스텝 앞에서 노래를 해봤는데 목소리는 갈라지고 코드는 틀리고 난리도 아니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나는 피자를 한 조각도 먹지 못한 채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렸다. 사회자가 앞에 나와서 독일어로 나를 설명하는데 하나도 못알아 듣겠고 뮤지커린 어쩌고만 알아들었다. 아, 내 차례라는 거구나.

다들 우르르 아래층 홀로 내려갔다. 나는 반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피아노 앞에 서니 쿵쾅대던 심장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긴장 풀자. 나는 나의 음악을 연주하면 된다. 듣는건 듣는 사람의 몫이고.

불안정하던 목소리도 차츰 노래를 부르면서 안정이 되었다. 끝에쯤 오니 나도 노래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가사도 채 외우지 못하고 앞에 놓인 가사지만 봐야해서 아쉬웠지만 목소리로도 충분히 전달 되었을까.

놀라운 경험이다. 다른나라 사람들에게 나의 노래를 들려준 이 경험. 짜릿했고 기뻤고 신기했고 가슴이 벅찼다. 그런 무대에 서본 건 나에게 너무 좋은 일이었다.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쁜데, 친구들에게 격려의 박수까지 받았다. 살면서 이런 순수한 박수를 받아볼 날이 얼마나 있을까. 내게 감정을 담는 통장같은 게 있다면 담아서 저장해뒀다가 우울할 때 꺼내쓰고 싶을 정도.


ㅎ0ㅎ <-노래할 때 이런 표정의 나와, 옆에 앉아 마이크를 들어준 박군.

좋은 기회가 찾아왔고 그때 마침 내 마음의 공간이 조금은 여유로워 기회를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작은 성취, 소소한 기쁨이 독일 생활을 시작하는 데 마음을 더 단단하게 해준다. 해볼만 할거야. 괜찮을거야. 안 괜찮으면 또 어때.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을거다. 소소함이 쌓여서 이곳 생활도 잘 적응하게 되길. 벅찬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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