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13. 22:52 2017년 한국
허무하고 안타까운 영화. 를 보면서 유독 한숨이 많이 나왔던 것은 주인공 다니엘이 사회가 마음대로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실감나리만큼 공감됐기 때문이다. 심장병으로 일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다니엘은 의사의 권고로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하지만 질병 수당을 받는 점수에 조금 못미치는 결과가 나오자 구직 활동을 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당장 수입도 없고 수당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자 다니엘은 실업수당을 신청하는데 이것도 만만치가 않다. 종이에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인 할아버지 다니엘에게 인터넷으로 실업수당을 신청하라고 하지를 않나, 도움을 주기는 커녕 자꾸만 기다리라 규칙을 지켜라 따르라고만 다그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점점 넌덜머리가 날 즈음에 다니엘의 이웃 케이트는 급기야 ..
2017. 5. 10. 12:15 2017년 한국
아이엘츠 시험을 보는 남편을 기다리며 강남의 어느 큰 서점에 들어갔다. 수천권의 책이 읽혀지길 기다리는 그곳은 내게 평온의 장소였다. 시간만 허락하면 무한정 읽을 수도 있겠는데. 남편이 끝나기까지는 한시간 쯤 남았다. 내가 고른 책은 '에고라는 적'. 영어 원서로 하면 'Ego is the Enemy'. '에고'가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와닿지 않았던 것도 있고 왜 에고가 적이라고 표현하는지, 무엇에 적인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책의 첫번째 장을 넘겼다. 저자는 에고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이라고. 소위 자신감의 과한 버전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굉장한 사람이라고 믿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자만심을 경계하라, 겸손하라.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잘나보이려..
2017. 5. 9. 11:33 2017년 한국
집에 왔다. 이상한 게 홀로 온 휴가가 끝을 향해 갈 수록 나는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어졌다. 집인데 나와 남편의 집은 아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는 남편이 있는 서울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누가 강제로 떼어놓은 것도 아니고 내 의지로 친정에 온건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아마 나는 이제 다른집 사람인가보다. 남편이 있는 곳이 내 집인.떨어져봐야 소중함을 안다고, 이번 휴가는 남편과 함께 있으려는 내 노력이, 내 의지가 옳았음을 확인시켜줬다. 부부는 함께 있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게 내 가치관이다. 이런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남편만 보내고 너는 여기서 경력을 쌓아라, 2년 떨어져 있는게 뭐 어떠냐, 지나고 나면 옳은 선택일 것이다 등등..
2017. 5. 4. 10:50 2017년 한국
친정에 내려와 소파와 한 몸이 된 지 일주일. 남편과 함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다. 정말이다. 캄보디아에서도 이렇게 시간이 많을 때가 있었다. 남편은 밖에 나가는 쪽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내 등을 떠밀어 줬다. 지금의 나는 말리는 사람도 없고 등 떠밀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시간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시간이 쏜살같이 내 몸을 관통해 흘러 지나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다. 쉬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닌 무의미가 지나간다. 나는 요즘 이렇게 소파에 누워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쉬지 않고 미드를 보고 있다. 요즘은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부터 정주행 중이다. 미국의 한 대형병원에서 인턴과정을 하는 5명의 외과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의사의 삶'..
2017. 4. 27. 19:27 2017년 한국
오랜만에 R을 만났다. R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다. 그때 R은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나중에 커서 초콜렛을 만드는 쇼콜라티에가 되고 싶다고 했다. R은 가끔씩 학원에서 직접 만든 수제 초콜렛이나 빵같은 것을 가져와서 친구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맛이 정말 좋았다. 내가 언젠가 매점에서 페스츄리 빵을 사 먹고 있으면 '거기에 설탕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면 아마 못 먹을 거다'고 R이 으스대던 것도 기억난다. (그 말은 내 빵 인생에 영향을 줬다. '페스츄리=설탕'이라는 공식으로.) 쇼콜라티에가 되고 싶다던 친구는 제과제빵은 적성에 안 맞다고 접은 지 오래고 지금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음료를 시켜 자리에 엉덩이가 닿자마자 R은 급히 입을 열었..
2017. 4. 25. 19:40 2017년 한국
나주에 있는 친정집에 잠시 가기로 했다. 작은 캐리어에는 며칠간 입을 옷과 책 몇 권을 담았다. 작년에 운 좋게 투고한 논문도 집에 꽂아 넣으려고 가져왔다. 엄마 보여드려야지, 하면서.날씨가 좋아서인지 집에 가는 마음도 가볍다. 버스를 타고 앉아선 점심으로 크림치즈를 덕지덕지 바른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럭저럭 맛이 괜찮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동안에 전부 먹어버렸다. 버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까지 8명. 평일 오전, 나주 가는 버스라 사람이 없으려나. 고속버스 한 채를 전부 전세 낸 느낌이다. 부자 된 느낌.3시간 50분쯤 지나니 나주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건 키 작은 건물들, 듬성듬성 서있는 아파트 사이로 솟아오른 산, 중학교 교복을 입고 떼 지어 다니는 아이들. 공간과 사람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