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삼겹살 그리고 남편

삼겹살의 추억

치이이익. 뜨겁게 달궈진 후라이팬 위에 8mm 두께로 썰린 삼겹살을 빼곡히 올려두었다. 곧 구수하고 기름진 돼지고기 익힌 냄새가 채식을 시작한 지 두달이 채 안된 나의 코 끝에 닿는다. 30년 가까이 내게 익숙했던 이 냄새. 그래. 맛있는 냄새가 난다. 

교회 자매들 점심 모임에 초대되어 우연히 언니들과 함께 장을 볼 기회가 생겼다. 나는 독일어가 유창하지도 않아 주문하기도 영 곤란하고 또 독일에 오자마자 채식을 시작했기 때문에 고기 살 일도 없으니 마트 안에 있는 정육점은 늘 쓱 지나가기 바빴다. 오늘은 달랐다. 목적지가 바로 정육점. 독일생활 십수년차 된 왕언니들이 능숙하게 고기를 주문하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봤다. “아, 저도 좀 사볼까요.” 나 때문에 덩달아 고기를 못 먹고 있는 남편 생각이 갑자기 스쳐지나갔다. “600g 정도 사고 싶은데..” 말 끝을 흐리자 언니들이 그런다. 그걸로 둘이 먹는다고? 1kg은 사야지. 

신성한 남의 영업장 앞에서 이런 말씀 드리기는 조금 거시기 합니다만, 나는 아주 쑥스러운 고백을 뱉었다. “아 저는 안 먹어요. 제가 채식을 해서요.” 다들 일순간 경악. "아니 그 좋은걸 안 먹고 어떻게 살아?" 나는 부끄럽게 웃으며 수습하듯 덧붙였다. “아직 두달 밖에 안 됐어요.” 이 시점에 다들 이상하게 안도한다.  그러니까 언제든 돌아올 여지가 있다는 거구나, 언니들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 많던 식욕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채식을 한다고 하면 열의 아홉은 이렇게 되묻는다.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답을 쉽게 하려고 “고기를 먹고싶은 식욕의 스위치가 꺼진 것 같다”고 표현했다. 사실 달리 말할 길이 없다. 네, 안 먹고 싶던데요, 라고 말 하면 너무 완고해보이고 또 아 정말 곤욕이에요, 라고 말하면 고행같아 보인다. 둘 다 이상해. 

남편의 하교시간에 맞춰 삼겹살을 야무지게 굽다가, 야들야들한 고기 냄새를 맡으며 스위치가 정말 꺼진게 맞나 의문이 들었다. 채식을 시작하고 내가 직접 고기를 구워본 건 처음.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이 고소한 냄새가 향수를 자극하는거다. 엄마가 어릴때부터 구워주신 그 삼겹살. 가족들이 둘러앉아 한 점씩 나눠먹었던 기억, 야채랑 함께 먹으라고 나를 채근하시던 엄마. 가족들 먼저 먹이려고 늘 후라이팬 앞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엄마의 모습. 

맛있는 냄새다. 즐거운 냄새이기도 하고. 그런데, 냄새를 맡으며 고기를 굽다가도 이것이 입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거부감이 일었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거부감일까. 이 삼겹살이 내 주방으로 오기까지 거쳐온 탄생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에 대한 상기일까. 예전엔 그렇게 잘 먹었던 고기를, 단순하게 안 먹기로 마음 먹은 순간 음식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고의 전환이다. 남편이 먹을 삼겹살을 다 굽고 내가 먹을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물을 올리면서 생각했다. 이 편이 마음이 더 편하다. 된장국에 감자를 넣어 먹을까, 좀 배부르게 먹게 떡국떡을 먹어볼까? 맛있겠다.

(사진 출처: http://www.realfoods.co.kr/view.php?ud=20161209000455)


채소의 세계가 열렸다

예전에 다이어트를 하려고 억지로 고기 섭취를 줄였을 땐 그렇게도 곤욕스럽고 고행하는 것 같더니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되. 지금 나의 식욕의 불은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 쪽에 더 환하게 켜진다. 빨갛게 잘익은 토마토를 쓱쓱 썰 때, 아삭아삭한 양상추잎을 씹을 때 나는 기분이 좋다. 좀 더 깨끗하고 가벼운 피가 몸을 순환하는 게 좋고 이 상태를 좀더 유지해보고 싶달까. 

언니들의 말처럼 언젠간 다시 육식 식단으로 넘어와야만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식단을 꾸준히 고수하하는 일은 상황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다. 나도 혼자 밥 해먹을 때는 어려움을 잘 못 느끼겠더니 교회 모임에 본격적으로 참석하니까 민망한 상황이 많이 연출된다. 한식으로 채식하기는 어렵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본다는 데 의의를 둔다. 왜 채식이 의미가 있는지, 채식을 해도 건강에 해롭지는 않은지, 이런 저런 지식은 여러 매체를 통해 배워나갈 필요가 있다. 이건 또 나의 선택이기도 하니까 타인에게는 강요하지 않고. (가까운 타인? 바로 남편.)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으로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남편을 보며 생각했다. 2주일이나 3주에 한번정도 이렇게 고기를 사와서 구워주면 한끼 해결 되겠는데?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남편은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정도'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하하. 떡줄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드링킹.

육식과 채식이 공존하는 식탁이 부디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길. 삽겹살을 구으며, 평화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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