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L 때문에 삽질한 이야기

독일생활 3개월차. 마냥 좋은 것만 보이는 로맨스 기간은 끝나버린 듯하다. 분터지게 답답하고 꼭지돌게 황당한 독일의 시스템이 바로 문앞에서 노크를 하고 있으니. 똑똑똑. 안녕? 그동안 발 뻗고 편안하게 잘 잤니? 이제 네가 고구마 먹을 타이밍이 돌아왔어. 기대해.ㅎㅎㅎㅎ

문제의 시작, 난방텐트 주문

우리집은 추워도 너무 춥다. 집도 지은지 오래되어 난방 시스템이 구식이다. 보통 독일 가정에는 각 방 벽에 하얀색 라디에이터가 붙어있기 마련인데 우리집은 가스난로가 딱 한 개 있다. 그것도 켜면 따뜻한 공기는 모두 거실로 가고 안방에는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 구조다. 무시무시한 독일의 겨울은 가까워져오고 있고 이제 작은 방에 임시로 머무는 학생까지 들어왔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입소문으로 듣게 된 "따수미 난방텐트". 11월 초 셋방 학생이 들어오겠다고 연락을 받자마자 큰마음 먹고 두 개를 질러버렸다. 안방에 놓을 2인용 텐트 한개와 작은방에 놓을 1인용 텐트 한개. 따수미 본점에서는 텐트 당 4만원을 내면 해외배송을 해준다고 되어 있어 배송비만 8만원을 썼다. 총 20만원.

목요일에 주문해놓고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갈수록 온도는 떨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급하다. 주말이 지나고 화요일. dhl에 배송조회를 해보니 드디어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는 메세지를 보게됐다. 그래. 오후엔 배송을 받을 수 있을거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이렇게 됐을 뿐이다.

목요일 오후.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벨소리만 기다렸다. 독일 택배배송은 보통 기사가 벨을 눌러 현관문이 열리면 아래에 놓고 가는게 대부분이다. 한국처럼 친절하게 전화따윈 하지 않기 때문에 dhl 홈페이지만 들락날락 거리면서 배송 추척을 확인하던 중이었는데. 아니 이게 뭐야?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신자가 택배를 거부했다고?

Recipient refused delivery???? Was?

미리 말하지만 난 거부한 적 없다. 난 집에 계속 있었다. 벨소리도 안들렸다. 황당한 마음에 아래층에 급히 내려가보니 다른집 택배는 와있는데 내 것이 없다. dhl 직원. 왜 내 택배는 도로 가져갔니?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저 비싼 텐트가 다시 한국으로 반송되면 어떡하나. 환장할 노릇이다. 이렇게 앉아있다간 안될 것 같아 급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집에서 20분정도 떨어진 dhl에 직접 문의를 하러 쏜살같이 달려갔다.

두달 배운 독일어로 뭘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심장이 쿵쾅댄다. 내가 말할 수 있는 문장으로 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굴려봤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한국에서 온 택배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종이를 내민다) 저는 집에 있었는데요! 왜 제 택배가 안 온거죠? 어떻게 택배를 찾을 수 있나요? " Ich warte auf mein Packet aus Südkorea. Ich war zu Hause. Warum ist mein Packet weg? Wie finde ich mein Packet?

침착하게 생각해놓은 문장을 뱉고 DHL 배송추적 내역 종이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읽고 난 그 직원.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미안하다며 여기에선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네들은 독일내 택배관련 업무이고 국제택배는 다른 곳에 문의를 해야한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아.. 전화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건물 밖을 나가자마자 직원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내음성이 나오고 뭐라고 뭐라고 설명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뭐는 1번, 뭐는 2번, 뭐는 3번 누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당황한 나머지 전화를 끊어버리고, 전화를 다시 걸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됐다니. 독일말도 못하는데 독일어 안내음성을 어떻게 알아듣냐. 짜증이 솟구친다.

침착하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잘 못알아듣겠다. 내가 1번을 눌러야하는지 2번을 눌러야하는지 모르겠다. 그 부분만 끊었다 다시 걸었다 3번은 반복해서 들은 것 같다. 언뜻 dhl express라는 말이 들리는것 같아 2번을 눌렀다. 다행히 신호음이 연결된다. 안내원과 연결되자마자 내가 한 말은 "영어로 말해도 될까요?"

배송번호를 알려주고 상황 설명을 대충 하니 듣고있던 안내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DHL Express에 가셔서 직접 물건 찾아오셔야 합니다. 주소는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왜 이렇게 된건지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라던지 이런 말은 없다. 급 피곤이 몰려온다. 사과를 듣는건 고사하고 반송이 안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택배 찾아 삼만리

내 예상대로 그 직원한테서 이메일은 안왔다. 내가 검색해서 가야지. DHL Express. 멀기도 해라. 슈투트가르트 공항 옆에 있다.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거다. 나는 왕복 차비로 만원을 썼다. 오전엔 아주아주 중요하고 빡치는 업무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집을 나섰는데, 오후에 택배를 찾으러 갈 것이기 때문에 돌돌이까지 끌고 나왔다. 이 열받는 일은 뭐였냐하면, 귀신같이 돈만 빠져나가고 일주일째 감감 무소식인 Polygo 교통카드를 재발급받기 위해 서비스센터를 가는 것이었다. 별일 다 겪는다. 나는 돌돌이를 돌돌돌돌 끌면서 시내 한복판을 횡단했다.

Polygo 교통카드 재발급때문에 SSB 서비스센터 갔다가 VVS 오피스 갔다가 다시 SSB에 돌아가는(2시간 정도 허비했다)  황당한 사태에 멘탈이 탈탈 털렸을 무렵 남편과 만나 DHL Express가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구글맵을 확인해보니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돌돌이를 돌돌돌돌 끌면서 20분 넘게 걸었다.

어제오늘 한 마음 고생, 힘들지만 괜찮다. 오늘 택배를 받아 갈테니까. 텐트를 무사히 돌돌이에 담아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모든게 해결된다. 이런 생각으로 위로를 삼아 dhl 센터에 도착했는데.

Was...? 내 짧은 독일어 설명을 듣더니 안내데스크에 앉아있던 덩치좋은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어디에 전화를 하더니 '없다'는 말을 들었나보다. 하..... 어제 전화로 여기 오라고 했던 사람 나와. DHL express에 짐 있으니 you must!!! 찾아가라고 그랬잖아. 

내 택배는 무슨 이유인지 다른 물류센터로 보내지는 중이었고 그 곳에서 우리집으로 배송해줄 것이라는 설명을 듣게 됐다. 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빡침이 올라온다... 돌돌이 끌고 온 구석을 싸돌아다녔는데. 오늘 하루 난 뭘 한걸까. 이 넓고 넓은 독일 땅에서 택배 찾겠다고 온 하루 반나절을 다 보낸 나는 지금 뭘 하는 걸까. 

돌돌돌돌돌돌돌돌............돌아버리겠다.....

진정하는데 한참 걸렸다. 내가 신경쓸데가 없어서 이런데나 신경쓰고 있는걸까? 더 바쁘게 살아야하나? 교통카드도, 택배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독일말도 잘 못해서 옹알거리는 나, 어쩔 수 없다. 말도 잘 안들리고 의사 표현도 잘 못한다. 당연하다. 이제 고작 이 나라 말 배운지 두달 밖에 안됐다. 근데 답답하다. 미치도록 답답하다. 

현실자각. 택배 하나 제대로 못받아 하루종일 끙끙대는 나를 만났다.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묻지도 못하는 나를 보았다. 어쩔수없이 오라니까 오고, 가라니까 가는 무력한 나, 타국에서 이방인이 된 나를 만났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하. 그러고 보니 아직 다 끝난 문제가 아니구나. 택배를 받기 전에는....ㅎ_ㅎ....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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