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와서 시작한 비건 라이프

내가 첫 번째로 채식을 시도한 경험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 당신은 나를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혜진인 어쩌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렸을 때의 나를 아는 사람일지도. 나는 고등학생일 때 한참 핫 했던 책 <육식의 종말>을 읽고 한순간에 채식의 필요성에 매료되어 2년간 채식주의를 했기 때문이다. 그땐 정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는데. (지금은 아님.)

고등학생이 실천할 수 있는 채식은 사실 대단하지 않다. 학생식당에서 반찬을 받을 때 고기 반찬을 받지 않는 정도. 부모님과 식사를 할 때면 늘 잔소리를 들어가며 고기가 아닌 반찬을 집어 먹은 정도. 그땐 외식도 없었고 외출도 많지 않았으니 어렵지 않았다. 채식을 하며 산다는 게.

2년간의 결심을 단번에 무너트리게 한게 스무살 첫 대학생활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이다. 무리지어 점심을 먹으러 갈 때마다 나 때문에 식단을 정하기 곤란한 친구들이나 대학생활이 여러모로 곤혹스러웠다. 다시 말하자면 뭔가를 지키기엔 가치관이 확고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기어렸던 채식 생활은 스무살이 됨과 동시에 잠재적으로 마무리 됐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대체 내가 뭘 주어먹고 있는지 감각이 점점 무뎌져갔다. 솔직히 닥치는대로 배고프면 입에 넣었고 내 건강이나 환경은 관심사 밖이었다. 나는 말도 못하게 바빴고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눈을 뜨면 밖에 나갔고 지쳐서 집에 들어오면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독일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찡하네.



누구나 비건 라이프를 시작할 수 있는 곳, 여기는 독일

독일에 도착하고 나서 남편과 나는 일주일에 다섯번은 넘게 장을 보러 갔다. 여긴 외식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다. 외식하면 정말 비싸다.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햄버거 체인점도 세트 메뉴가 한국보다 2천원은 넘게 비싼 것 같다. 

우리는 오자마자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집근처 슈퍼마켓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다녔다. 하루는 시리얼을 사오고 하루는 과일을 사오고, 다른 날은 샌드위치 재료를 사오고. 내가 임시로 머물렀던 숙소는 슈투트가르트 내 바트칸슈타트(Bad Cannstatt)라는 시내였는데 여기에는 Kaufland라는 대형마트가 있었다. 우리나라로 하면 이마트같은 느낌.

슈퍼마켓을 매일 가면서 꼼꼼하게 코너별로 둘러보니 우리나라의 마트와 다른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눈에 띄었던 건 바로 비건 마크. Vegan 이라는 마크가 식품 곳곳에 붙어 있었다. 비건 햄도 있고 비건 치즈도 있고 비건 빵도 있다. 비건 식품만 따로 모아놓은 코너도 있었다. 아. 독일은 비건들을 위한 나라구나.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 What the Health

슈퍼마켓에 널린 다양한 비건 식품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것과 맞물려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보게 된 영상이 있다. 바로 <What the Health> 라는 1시간 3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이라는 타이틀로 번역되었다.

이 영상은 육식과 유제품을 먹는 식단의 위험성을 개인적, 사회적, 환경적인 측면에서 아주 설득력있게 잘 보여줬다. 감독이 간을 배 밖으로 꺼내놓고 다큐멘터리를 찍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 세계의 육류관련 종사자들과 제약회사, 의사들을 모두 대놓고 깠다.

"음식이 곧 약이고 약이 곧 음식이어야 한다 -히포크라테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우리를 설명해준다는 말 처럼 삼시세끼 먹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잊고 있었다. 내 몸을 위해서, 이 지구를 위해서 채식을 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바로 그 날부터 채식을 하기로 결심. 버거킹 치킨버거 세트를 점심으로 먹은 것을 마지막으로 고기 섭취를 끊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꼭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추천한다. 이 영상이 당신의 식단을 완전히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감독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도 있는데 더 관심이 간다면 확인해 보길 바란다.(http://www.whatthehealthfilm.com/) 



1개월차 초보 비건의 식탁

<What the Health>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나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며 공감을 이끌어내보도록 애써봤지만, 남편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 같다"며 참여를 미뤘다. 어쩔 수 없지. 각자의 관심사를 존중해 주기로. 아무래도 요리를 내가 할 때가 많으니 어쩔 수 없이 채식 식단이 더 많아지겠지만 남편은 불평없이 받아들여줬다.

처음 시작은 가벼운 마음으로 샐러드와 과일, 비건 식품 위주로 장을 봐왔다. 이번에 나는 치즈나 요거트, 우유같은 유제품을 포함해서 생선까지 먹지 않는 비건을 실천해보기로 했다. 

다음은 내가 한달동안 먹었던 비건 음식들.

다양한 종류의 비건 식품들. 정확히 말하면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품과 비건을 위한 식품으로 나뉜다. 


내입에 딱 맞았던 페이스트. 빵에 발라먹으면 매콤새콤하니 맛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독일은 다양한 비건 식품들이 많기 때문에 쉽게 채식을 시도해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주로 아침으로는 두유에 뮤즐리를 타서 먹었고 점심으로는 샌드위치와 샐러드. 저녁에는 파스타나 피자, 한식을 해 먹었다. 이렇게 먹어도 맛이 좋고 또 건강하기까지 하니 일석이조다. 물론 다양성은 좀 부족하지만. 채식 레시피를 아직 잘 몰라서 연구가 더 필요하다.


두유 & 뮤즐리 콤보


파스타에 잘게 말린 두부를 넣어봤다. 맛도 좋고 식감도 좋다.


내가 빵에 비건 햄, 치즈를 넣고 방울토마토랑 먹는 동안 남편은 피자 한판을 비운다. 


채소와 복숭아, 블루베리, 아보카도를 듬뿍 넣은 샐러드. 드레싱은 오렌지 주스로 대~충.


이사오고 첫 날 해먹었던 된장국. 냉장고에 있는 반찬으로만 만들다 보니 된장국에 두부만 떠다닌다.


에데카에 갔더니 비건 냉동피자가 있어서 구워봤다. 한 판에 4유로. 야채가 듬뿍 올라가있어 맛있었다. 


비건 피자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직접 만들어봤다. 좀더 다양한 야채를 올리고 싶었지만 손님 맞이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후다닥 버섯, 방울토마토와 비건 모짜렐라 치즈만. 오븐이 열일 했다.


집들이 온 지인들을 위한 제육볶음은 남편이, 비건 피자는 내가, 떡볶이는 친구가 만들었다.


한 달정도 비건 식단을 유지하고보니 베지테리언 피자에 들어가는 치즈라던지 빵에 들어가는 유제품, 가끔씩 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렛은 피하기가 어렵다. 일부러 우유나 치즈, 요거트를 사서 먹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먹게 되는 소량의 유제품은 먹지 않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세심하게 살피기도 해야하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을 놓는다고나 할까. 고기는 거부감이라도 들 수 있는데 달콤한 과자나 아이스크림은 유혹적이다.

비건 레시피 연구가 좀더 필요하다. 매번 파스타나 된장국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 내가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준다면 남편도 자연스럽게 채식에 동참할지도 모르니까. 우리 입으로 들어갈 음식이다. 건강하고 깨끗하고 싱싱한 채소와 야채를 섭취해야지. 이제는 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들에 관심이 간다. 생각한대로 살아보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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