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여백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

나주에 있는 친정집에 잠시 가기로 했다. 작은 캐리어에는 며칠간 입을 옷과 책 몇 권을 담았다. 작년에 운 좋게 투고한 논문도 집에 꽂아 넣으려고 가져왔다. 엄마 보여드려야지, 하면서.

날씨가 좋아서인지 집에 가는 마음도 가볍다. 버스를 타고 앉아선 점심으로 크림치즈를 덕지덕지 바른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럭저럭 맛이 괜찮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동안에 전부 먹어버렸다. 버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까지 8. 평일 오전, 나주 가는 버스라 사람이 없으려나. 고속버스 한 채를 전부 전세 낸 느낌이다. 부자 된 느낌.

3시간 50분쯤 지나니 나주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건 키 작은 건물들, 듬성듬성 서있는 아파트 사이로 솟아오른 산, 중학교 교복을 입고 떼 지어 다니는 아이들. 공간과 사람 사이로 여백이 많아 보인다. 비어있는 곳만큼 마음의 여유가 차오른다. 작은 캐리어를 돌돌 끌면서 집까지 걸어갔다. 바쁠 것도 없고 딱히 할 것도 없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캐리어가 지나가는 소리가 내 발걸음을 따라 요란하게 울린다.

아파트 정문에 닿자 그 제서야 집 주소가 뭐였지 하는 생각이 든다. 101동인가, 102동인가. 잠깐, 6층인가 8층인가? 비밀번호는 뭐였지? 머릿속에 숫자가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모르는 집에 가서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느니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보기로 했다. 친정이 새집으로 이사 가고 이제 세 번째 가는 거다. 이제 기억의 저편을 뒤집어봐야 집주소가 기억난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니라 '부모님의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무도 없는 방에 인사를 남겼다. '다녀왔습니다'가 아닌 '저 왔어요.' 불도 켜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집에 왔구나.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평일 낮에 (그것도 월요일에!) 친정집 소파에 벌러덩 누워 있다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시나리오야!’라고 소리치면서 코를 벌렁거렸다. 나쁘지 않다. 감사하게 즐겨야지.

그렇게 누워 아까 버스 타기 전에 잠깐 만난 친구와 나눈 얘기를 떠올려봤다. 우리는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며 좋아하는 영화와 감독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버스를 탈시간이 되어 일어날 때 즈음 그 친구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내게 '글 잘 읽고 있다'고 말했다. 내 글을 읽으면 재미있다고. 그래서 다음 글은 언제 올라오는지 기다린다고세상에!!! 내 글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니. 이 말은 마치 라디오 방송의 한 구간이 계속 반복되듯이 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독자가 있다니! 잊고 있었다. 빙긋이 웃음이 났다. 기쁘다.

이건 기적이다. 기쁜 일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더 즐겁게 써야지. 더 기쁜 마음으로 써야지. 내가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기록해야지. 그전에 소파에서 먼저 일어나야겠지만. 부지런을 떨기엔 한없이 퍼져있고 싶은 친정이지만. 어쨌든! 좋은 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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