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밖에 나가 돈을 써보자

이메일을 너무 기다렸더니 꿈까지 꿨다. 우리는 지금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나는 어젯밤 4개의 다른 메세지가 오는 4번의 다른 꿈을 꿨다. 그 정도다. 거의 마지막 희망이자 바람이었으니까. 아이엘츠 6.5는 못 맞았고 그 다음엔 뭐? 6.0으로 비빌 언덕을 찾아보는 것. 네덜란드는 너무 늦었고 덴마크는 안되는 것 같다. 남편이 샤워하는 동안 이메일이 와서 열어보니 안된단다. 6월 15일까지 점수를 내지 않으면 바로 자동 입학 취소가 된다고.

바보. 6월 15일까지 이제 2주도 안남았는데(글 쓰는 시점은 6월 2일이다) 갑자기 6.5가 될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매주 시험을 보기도 돈이 없고. 아, 결국엔 이렇게 되는 건가. 이따 남편이 나오면 뭐라고 상의를 해야할까. 우리는 정말 어떻게 되는걸까.

생각했던데로 풀리지가 않는다. 한 학기만에 유학 준비를 하는 것은 아마 무리였나보다. 인생에서 뭐가 가장 좋을지에 대한 해답은 아무것도 없지만 잠시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못 잡겠다.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남편은 모니터 속 글자만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고 나는 펜을 잡고 글을 쓴다. 우리 둘다 지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 * *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을때면 늘 캄보디아가 떠오른다. 1년 내내 무더웠던 그 나라에선 선풍기가 항상 켜져 있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건 심히 꺼려질 정도로 더웠으니까 머리는 늘 선풍기로 대충 날리고 마는 것이다. 선풍기 앞에 서서 몸이 고슬고슬 말려지는 게 좋았따. 그렇게 한참이고 있을 수 있다.

어쩐지 운동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어라, 이거 좀 쌘데?"하는 순간 내 한계를 자꾸 넘나드는 느낌이다. 팔굽혀펴기는 흉내도 못냈었는데 요즘은 조금 굽히는 정도가 커진것 같기도 하다. 숨이 차다. 죽을 상이 되어 집에 도착하면 곧 쓰러질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샤워를 하면 몸에 붙어있던 피로 분자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시원한 몸을 한것 끼얹으면서 바보같은 생각을 한다. "이거 좀 더 해도 되겠는걸?"

저녁을 먹고 식구들과 동네 한바퀴를 거닐었다.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기 좋아하는 남편의 뜨뜻 미지근한 요구에 동네 카페에도 갔다. 'Little Talk'라는 이름의 이 카페는 하얗고 작은 곳이었다. 젊은 바리스타는 친절하게도 원두 두가지를 소개했고 손님에게 고를 수 있도록 안내했다. 미술관처럼 조명이 천장에 달려있었는데 하얀 배경과 잘 어울어져 근사한 분위기가 났다. 거리를 향해 전면이 유리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좁은데 결코 좁아보이지 않고 시원하고 또 친근했다. 우리 넷은 거리를 향해 일열로 앉아 창 밖 구경을 했다. 조명도 거리도 음악도 커피향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지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주 좋아한다. 카페도 가고 싶어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먹는 것도 좋아한다. 여행을 가서 새로운 것을 보고 돈쓰는 일은 남편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이 모든 행위는 나와 함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남편은 서둘러 덧붙였지만 꼭 내가 없어도 남편은 '누군가와 함께' 같이 있고 (돈을 쓰는) 노는 일을 좋아한다. 나는 남편이 돈을 쓰러 나가자고 꼬득일때면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지만 대부분은 넘어가버린다. 남편은 내가 말렸기에 이정도 적정선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적정선 같은게 있기는 할까? 기준도 자꾸 바뀐다. 상황에 따라서.

돈쓰러 나가는 일도 사실은 좋은 점도 많다. 내가 인정하면 왠지 남편이 으쓱해질까봐 이말을 자주 언급하지는 않으려 한다. 새로운 곳에 가서 천천히 주변을 관찰하고 또 그곳에 대한 소감을 서로 나누고 그곳에 익숙해지려는 과정이 재밌긴 하다. 인정! 돈쓰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아, 자주 쓰는 것보다 가끔써서 느끼는 자극이 더 큰것 같기는 하다. 자극도 점점 더 큰것을 원하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뭘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면 가끔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서 돈을 쓰는 것도 좋겠다. 적어도 전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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