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이 없는 본 무대

뭔가 대단한 것을 쓰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부터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는다. 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다가 만연필의 잉크를 바라본다. 발등을 긁고 다시 생각하다가 물 한모금을 마신다. 그러다가 제풀에 지치고 만다. 에잇, 평범한 이야기나 쓰지 뭐.

다른 부부들은 시간이 많을 때 무얼 하는지 늘 궁금했었다. 우리는 캄보디아에 있을 때 상대적으로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처음엔 매일매일 뭘 해야할지 몰랐다. 시간이란 것이 아무리 흥청망청 써도 그 다음날이면 정확하게 원 상태로 다시 채워졌으니까. 시간을 다 써도 다시 채워지는 게 신기해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냈다. 이유가 안되는 논리지만 냉장고 안에 먹을 게 아무리 많아도 그 다음날 똑같이 다시 채워지는 원리와 같았다. 그래서 닥치는대로 시간을 해치웠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니 시간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분할하기도 했다. 조금은 이렇게, 일부는 저렇게 쓰자고. 게걸스럽게 해치우기만 했던 때와는 조금 달랐지. 우리는 같이 있는 시간동안 주로 요리를 해서 먹거나 뉴스를 같이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스토리를 평가했다. 주말이 되면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사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각자 하고싶은 일을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이 순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며칠 전 지인 부부를 만나서 얘기를 나눴는데 이 부부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참 귀여웠다. 이 부부는 만화 원피스에 심취해서 1편부터 400편이 넘어서까지 쭉 보고 있고, 시간이 많을 때는 원피스 주인공이 그려진 큰 캔버스를 두고 나란히 앉아 색칠을 한다고 했다. 원피스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피규어를 사면 집안 어딘가에 두고 같이 본다고. 참 사랑스러운 시간이다.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을 질적으로 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통분모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니 이건 결혼 후에 만들어가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물론 각자의 취미생활은 존중해야겠지만 적어도 하나쯤은 매일 같이하는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 손잡고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한다던가 그림을 같이 그린다거나 공원에 나가서 프리레틱스를 한다거나.


나는 아침산책에 대한 로망이 있다. 꼭 열심히 뛰지 않아도 된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하루를 맞이하고 싶은, 그건 내 환상같은 이미지이다. 지금은 비록 눈만 뜨면 5분이라도 더 자고 싶어서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남편과 아침을 맞이 하는게 습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양쪽 모두 어느정도는 양보를 해야겠지. 남편이 나와 함께 자전거를 타면 나를 앞질러 쌩쌩 패달을 밟고 싶은 욕구를 어느정도 누른다고 한다. 나는 나 나름대로 남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카페에 가서 돈을 쓰고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모두 맞춰주고 있다.

매일 매일은 선물이다. 아침에 선물받은 스물 네송이의 꽃이 아무리 밟히고 찢겨지고 흙이 묻어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싱싱한 꽃다발을 다시 댓가없이 받는다. 한 송이도 모자란 것 없는 정확한 24시간을. 그 시간을 어디에 쓸지는 그날의 나, 그 시점의 우리가 결정한다. 흥청망청 쓰기보다는 조금은 규모있게 써봅시다,라고 마무리.

* * *

언제부터인가 흰머리가 눈에 띠기 시작했다. 그저 새치겠거니 하고 한 두개 뽑고 말았던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본 경황이 없었던 캄보디아 생활 이후로 거울을 들여다보면 흰머리들이 듬성듬성 눈에 띤다. 나이듦의 포착. 젊음이 계속될 줄 알았는데 몸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낯설다.

사람들은 계속 낯설기만 하다 가는 걸까. 익숙해질 새면 금새 새로움이 찾아오고 변화를 겪는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모든 것이 새롭다. 다 처음 겪는 일이다. 아이를 처음 유치원에 보내는 엄마도 그게 처음이고 아이는 또 아이 나름대로 유치원에 가는게 처음. 모두가 낯설고 새로움을 경험한다.


리허설이 없는 본 무대. 매번 처음을 경험하는 인생. 하나님이 설계해놓은 우리 인생이 이러하다. 모두가 동일한 하루, 처음의 처음을 경험하니 공평하다. 인생을 두번 살아본 사람도 없고 그래서 딱히 능수능란한 사람도 없으니. 거기서 거기, 고만고만하다.

모두가 각자의 처음을 경험하는 중이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부담을 안고 문제를 겪고 있다. 씨름을 해서 넘어서기도 하고 천천히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각자의 방법이 다를 뿐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나는 나의 길 앞에 서 있다. 서른살의 문이 열릴락 말락 한다. 아직 만으로는 27살이라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고 있지만 여지없는 20대 후반. 철모르던 고3 이후로 무려 10년이나 흘렀다. 야자를 째고 친구와 뮤지컬을 보러가며 설레였던 그때로부터 10년이다. 그때의 나는 스물아홉의 나를 가늠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적어도 뭔가 이루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어떤 분야에서 '누군가'가 되어 있을거라고 기대했따. 그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느낀 것이 최근이니. 그땐 환상에 젖어있었던게 분명하다.


10년의 간격이 그 숫자만큼 크지 않다면 지금부터 10년 후의 나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10년 후에도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다행이고. 사랑하는 남편과 쭉 같이 살면 감사한 일이고. 금쪽같은 새끼들도 생긴다면 더할나위없이 기쁜 일이겠지. 19살의 내가 철없이 기대했던 대단한 '누군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덜하다. 그저 건강하게 하루를 맞이했으면. 그때까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록하는 습관이 유지됐으면. 지금보다는 여유를 갖고 웃으면서 살기를. 닥쳐오는 낯선 변화와 환경에도 조금은 간격을 두고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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