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천국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남편과 함께 8시 15분쯤 잠에서 깼다. 많이도 잤다. 남편은 오늘부터 다시 출근하지 않는다(글쓴 시점은 지난주 월요일). 3주간 영어공부를 하고 다시 아이엘츠 시험을 본다. 독일행을 준비 중이다. 3주가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나도 안다. 그렇다고 말릴 수는 없는 일이다. 뭐든지 끝까지 가봐야 하는 법이니까. 내가 남편을 재촉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의지가 있어서 가려는 길이다. 스스로 갈 수 있도록 힘을 줄 뿐 용기를 꺾는 일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왔다. 군자역에서 아차산역을 지나 광진정보도서관이 있는 광나루역은 쭉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남편과 나는 자전거를 1단 기어에 맞춰놓고 안타까운 발길질을 해대면서 오르막길의 끝까지 겨우 올라왔다. 짜릿짜릿한 내리막길로 운동방향이 바뀌는 절묘한 순간. 머리카락을 헝크르며 지나가는 바람이 기분 좋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계속 힘드리란 법은 없다.

캄보디아에서 한국까지, 몇천km를 따라온 우리의 자전거

집에서 도서관까지, 횡단보도 기다리느라 짧게 몇 초 쉰 것을 빼면 쉬지않고 단숨에 15분이 걸린다. 평일, 그것도 월요일 아침 10시. 우리는 당연히 도서관이 한가할 줄 알았는데 도착하고나서 놀랐다. 칸막이가 있는 1열람실은 이미 만석이다. 이 사람들은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왔나보다. 대단한 열정의 사람들. 우리보다 이루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사람들일까? 우리는 8시 15분에 일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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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네덜란드 바헤닝언 대학교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남편은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어쩌면 마지막 보루, 보험같이 은근히 기대했던 곳이었다. 어려울 법도 했다. 바헤닝언 대학은 농업분야에서 세계 1위 대학이니까. 덴마크보다 독일보다 더 합격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입학을 위한 아이엘츠 점수는 6.0으로 우리가 현재로서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충격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덴마크는 눈물을 머금고 보내야했고 네덜란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 앞에서 멀어졌다. 이제 남은건 독일. 지금 우리에게 아이엘츠 6.5는 모험이다.

6.5가 안나오더라도 (혹시) 네덜란드에 붙을 수도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솔직히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인가 보다. 큰일 난거 맞다. 끝까지 온것도 맞다. 불합격을 2연타 겪어서 맥을 못추리는 것도 맞다. 한계치를 넘어가고 있는거 맞다.

이제 어떡하지. 남편이 메일을 읽으며 멍해있는 동안 나는 조용히 씻으러 들어갔다. 머리를 감으면서, 씻으면서 이 생각이 떨쳐지지가 않는다. 이젠 어떡하지. 어영부영 4개월이나 지나버렸는데. 앞으로 또 몇 개월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는다. 독일에 갈 수 있게 되면야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고려를 해야한다. 다 떨어지게 될 경우. 모두 길이 막혔을 경우는 어떻게 해야할지.

캐나다에 둥지를 틀은 Ella&Kyle 부부가 보내준 그림같은 사진. 아, 멋지다. 이 하늘이, 호수가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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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왔다. 이런 상황에 정말 한가롭기 짝이 없다. 어슬렁어슬렁 손깍지를 끼고 골목을 걸어다니다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하나씩 입에 물었다. 서늘한 여름밤 가로등 빛 아래로 어슬렁, 진한 초코바 한입을 물고 어슬렁. 한량이 바로 우리가 아닐까? 가족에게 얹혀살면거 최소한의 돈만 벌어서 아이스크림을 물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이라니. 한량의 삶이로세.

남편에게 어렵게 얘기를 꺼내긴 했는데 결론이 내려지진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마무리가 도통 지어지지 않는거다. 가도 걱정, 안 가도 걱정. 모든게 걱정. 이러다가 소중한 시간이 다 가버릴텐데, 하면서도 걱정. 이 마약같은 걱정의 순환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결국 우리가 한거라곤 '진짜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들어온거다. 모르겠다. 뭐해먹고 살아야 할까.

나도 모르겠는데 남편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하지 않고 남편만 닥달할 수는 없다. 어쨌든 앞으로 가긴 하는데, 나는 뭘 할 것인가. 번역을 생각해보고 강의를 듣기 시작했지만 딱 '이거다!'하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과제만 해도 그렇다. 미루고 미뤄서 전날에 후다닥 해치워버린다. 꾸역꾸역. 숙제를 하다보면 예전에 8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신청했던 한국어교원 자격증 강의가 떠오른다. 그때도 지겨워졌다. 물론 그때는 음악치료사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택'하고 나머지를 가지치기 한답시고 포기한 거지만.

사노요코, '사는게 뭐라고' 중에서. 아흔살 치매걸린 엄마와 만나 천국을 얘기하는 작가 요코 할머니.

Get out of your mind and go into your life. 해결되지 않은 과거와 해결해야 할 미래 어딘가에 표류하면서 현재를 잃어버리진 말자. 우리는 나름 소중한 과정을 함께 경험하는 중이다. 부부로서 함께 앞날을 고민하고 실패를 서로 토닥여주고 고쳐야할 점을 재평가 하면서. 이 과정 동안 우리가 대화하고 격려했던 모든 경험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의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현재를 살자.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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