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부탁해, 슈투트가르트

비행기 창문 밖으로 처음 독일의 민낯을 봤다.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 덕분에 우리 얼굴은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지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독일은 환하기만 하다. 초록빛깔 논과 산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들이 대부분의 풍경을 차지하고 있다. 안녕, 독일. 조금 피곤하고 졸린 첫 만남이다.

뭔가 푸르르고 옹기종기한 느낌. 독일을 만난 첫 느낌이다.

11시간 반 동안 우리는 영화를 세 편 보고 기내식 두번에 간식 한번을 먹으며 무료한 시간을 떼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만 죽였다. <아빠와 딸>, <조작된 도시>,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더 쉘> 이렇게 세편을 연달아 봤는데 사실 중간 거 제목은 뭐였는지 박군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생각이 난다. 지창욱 미안해.

인천공항으로 오면서 스스로 다짐했던 건 무슨일이 있어도 '조금 덜 당황해보자'는 것이었는데, 그 다짐을 시험하게 만드는 사건이 초반부터 등장하기도 했다. 바로 기타. 그놈의 기타. 애증의 기타. 캄보디아에 갈 때도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더니.. 기내에 들고가려고 일부러 소프트 케이스에 모셔온 내 님 테일러 기타가 절대 기내 반입이 안된다는 것이다. 단호한 표정을 짓는 직원 앞에서 나는 이미 멍해졌다. 아무리 창구직원을 설득해봐도 안되는건 안된다고. 순조롭게 꼬리를 내렸다. 네. 안된다면 어쩌겠어요. 바로 시부모님 손에 들려 테일러 기타는 완도로 바이바이. 에라 모르겠다. 포기는 쉽게하자.

독일에 도착하고 우리 부부의 첫번째 미션은 입국심사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비자를 받지 않은데다 편도로 들어왔기 때문에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깐깐한 독일 앞에 무릎이라도 꿇릴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보낸 입학서류와 함께 우리가 부부 임을 증명하는 혼인관계 증명서 공증받은 서류를 들고, 뭐라고 물어보든 잘 받아 치리라 다짐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여보. 긴장하지마." 박군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응. 나 긴장 안 해." 내가 받아치니 말한다.

"내가 긴장해서 그래..." (피곤)

한껏 마음을 장전하고 내 차례가 왔는데, 서류를 내밀기도 전에 아무 것도 묻지않고 쾅, 도장을 찍어주는게 아닌가! 수퍼 쿨!!

오늘의 미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기로 구한 집까지 무사히 가는 것까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중앙역까지 이동하기, 중앙역에서 슈투트가르트가는 열차 잘 타기. 이 어려운 걸 우리가 해냅니다.

슈투트가르트 중앙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루가 참말로 길다. 해는 아직 짱짱하다. 이제 시작이다. 잘 지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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