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쉬는 동안

1. 뜻밖의 이사

잔지바르에 오고 우리가 살게 된 첫 번째 집은, 고양시 신혼집-캄보디아 프놈펜-독일-다시 한국 보길도 등등 여러 집을 경험해본 우리에게 가장 좋은 컨디션의 집이었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아이들이 편안하게 탄자니아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참 감사했다. 별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지낸 우리 가족에게 찬물을 끼얹은 일이 생겼으니.... 쿵쿵 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는 아래층 젊은 부부의 항의였다.

충격이었다. 로이는 심지어 아직 걷기도 전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와서도 층간소음으로 마음 졸이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뛰어다니는 하니를 조심시켜 보기도 하고 우리도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노력을 들여봤지만, 주말 오전(!!!)에 하니와 하니 친구가 가볍게 노는 중에도 시끄럽다는 컴플레인을 받고서는 마음이 심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둘째까지 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 걸까.

남편의 스트레스가 컸다. 피해 주는 걸 싫어하는 남편의 성향도 한몫했기에, 하니의 움직임만 더욱더 제한되고 애꿎은 잔소리만 늘어갈 뿐이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남편은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무실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단독주택 컴파운드의 한 집이 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만약 이사를 가게 된다면 더 이상 3층까지 식재료를 들고 아이들을 들쳐 매고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엄청난 장점과, 아이들이 문만 열면 바깥을 뛰어다닐 수 있다는 강력한 두 번째 장점이 이사를 빨리 결정하는 동기가 되었다. 5월 말에 결심하고 집주인과 의논을 했는데, 아래층 컴플레인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던 집주인이 흔쾌히 한 달 안에 이사하는 걸 허락해주어 순탄하게 진행이 됐다.


이미 여러번 이사를 경험하긴 했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 하는 이사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나 혼자만). 남편은 그냥 떼려 넣고 가져갔다가 풀면 되지 뭐, 하는 식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가깝게 지내는 선교사님들의 도움으로 이삿짐을 넣을 박스도 빌리고 큰 대형 트럭도 빌려 짐을 쉽게 떼려 넣고 옮길 수 있었고 거기에 건물에서 일하는 현지인들이 짐 나르는 걸 도와주어, 남편의 말대로 물건은 새집에 다 가져다 놓은 셈이다.


7월 1일부터 살게 된 우리의 보금자리에는 이제 아래층 사람이 없어 마음껏 뛰어놀아도 눈치 받지 않는다. 예전에 아이 둘을 데리고 산책을 나갈 때면 유모차에 짐에 아이 둘을 데리고 3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문만 열면 나갈 수 있는 주택은 정말 신세계였다. 온갖 식재료와 먹을 물을 들고 올라가지 않아도 되고, 다른 어린이들을 초대해도 퍼져나가는 소음에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놀랍도록 아이 친화적인 환경에 절로 감사가 나온다.


2. 하니의 길고 긴 여름방학

하니는 잔지바르 국제학교의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올해 2월부터 한텀 반 정도 학교에 다니며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는데 6월 말에 텀이 모두 종료가 되면서 학교는 두 달간의 방학에 돌입했다. 8시부터 12시까지. 짧지만 그래도 숨 돌릴 아주 짧은 틈을 마련해준 고마운 시간이었는데, 방학에는 두 아이들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지고 볶으며 남편 퇴근 시간만을 바라보는 삶에 다시 돌입해야 하는 거다.

유튜브 촬영은 주로 토요일 오전에 해오긴 했지만 세세한 음악 편집이나 앨범 준비 등은 평일 오전, 하니가 학교 가는 시간에 로이 낮잠을 재워가며 그 짧은 틈에 1-2시간씩 해왔었다. 이제 아이 둘을 보살펴야 하니.... 두 달간 엄마의 일은 잠시 접기로 마음먹고, 아이들과 복닥복닥 매일매일을 충실히 살아내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매일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밖에서 놀고 들어와서 안에서 놀고. 때 되면 밥 만들어 먹고 간식 만들어 먹고. 낮잠 자고 일어나서 다시 놀고. 책도 읽고 만들기도 하고 색칠도 하고.... 집도 넓어졌겠다 마당도 있겠다 정말 원 없이 놀고 놀고 또 놀았다. 새집 부엌에는 꽤 성능이 좋은 오븐도 딸려 있었는데 덕분에 빵이며 피자 쿠키, 머핀... 독일에서 먹던 그리운 브레첼까지... 정말 소원풀이를 다 한 듯하다. 이제 아침에 먹는 빵은 더 이상 사지 않고 만들어 먹고 있다.


3. 하니의 말라리아

방학을 즐겁게 보내던 하니가 어느날 기운이 없고 열이 나더니 먹은 것을 다 토했다. 감기 증상은 동반되지 않았기에 다른 질병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혹시 말라리아라면 반드시 빠른 처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니를 잔지바르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피검사를 해보더니 말라리아는 아니라며 피에 염증이 있으니 항생제를 복용하라고 처방해줬다. 하루 내내 먹은 것이 없어 병원에서 수액을 맞히고 집으로 데려왔지만 여전히 힘없고 쳐져 있는 하니... 하니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시는 한 선교사님께서 어린이들은 말라리아 키트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다시 받아보라고 조언해주셨다.


다음날 아침, 부랴부랴 선교사님께서 추천해주신 현지 클리닉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하니는 또 아침에 먹은 걸 다 토하고... 도착하여 진행한 피검사 결과, 놀랍게도 원인은 말라리아였다. 큰 병원에서도 잡지 못했던 말라리아 바이러스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하니의 피 안에 발견이 되었던 모양이다.

3일간 주사 치료와 6일간 항생제를 경구투여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빠른 처치 덕분인지 하니는 눈에 띄게 회복하는 속도가 빨랐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오히려 말라리아라 감사했다. 말라리아는 치료받으면 되니까.. 다른 큰 병이 아니라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라서, 빨리 발견하여 빨리 치료받을 수 있었기에 감사했다.


4. 새벽을 깨우는 삶의 시작

하니가 방학을 하고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아이들을 위해 쓰게 되면서 나의 내면에는 소리 없는 변화가 있었다. 아침에 아이들과 눈을 함께 뜨고 온종일을 복닥이다가 아이들이 잠들면 나도 잠들고 그다음 날 아침이 되면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날마다 비슷한 삶. 표정을 잃어가는 나. 나는 조금씩 내면이 말라가고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먼저 어떻게든 내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려 애써봤다. 하지만 온종일 아이들과 시달리고 난 뒤에 맞이한 저녁에는 나를 위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말씀을 읽어보며 경건 시간에 다시 힘써보려 애썼다. 하지만 좀처럼 매일 이어지지가 않았다.

시간의 우선순위를 두기로 결심했다. 아이들보다 일찍 눈을 떠서 2시간 정도는 나를 위해 사용하기로. 4시 반에 울리는 알람을 황급히 끄고 일어나 서재로 이동한다. 미리 깔아놓은 매트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깨우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 심장 박동을 높여간다. 1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고 샤워한 뒤에 앉은 책상에서는 나만의 경건 시간, 리트릿 시간을 갖는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내 시간을 충분히 갖어도 육아가 버거운 건 여전한 사실이지만(오후가 되면 졸리는게 함정) 나를 가꾸는 시간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은 내 내면을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난 5주간 새벽을 깨우며 조금씩 나만의 활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용기를 한줌씩 모으는 중이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진 않겠지만 그저 오늘 하루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낼 나의 활기를 되찾을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5. 할아버지의 소천

지난 주 목요일 아침. 아이들 아침을 부랴부랴 먹이고 있는데 친오빠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오빠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할 리가 없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할아버지의 부고를 직감했다. 화면 속 오빠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말 통화 중 엄마는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었다. 최근 몇 달 간 급격하게 몸이 나빠지신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요양보호사로 근무하시는 요양원으로 할머니와 함께 들어가셨다. 몇 해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할머니를 직접 간병까지 해주신 할아버지셨는데... 할아버지는 91년의 삶을 뒤로하고 소천하셨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의 죽음이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댁에 자주 드나들었고 할아버지도 살갑게 안기는 손녀를 퍽 예뻐해 주셨다. 결혼하고 나서는 캄보디아며 독일이며... 해외생활을 하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탄자니아에 오기 전, 로이를 품고 있을 때 작년 봄쯤 할아버지 댁에 인사드리러 갔던 것이,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하니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차 안에서 핸들을 잡고 엉엉 울었다. 이럴 때면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는게 한없이 슬퍼진다. 할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슬픔으로 얼룩진 아빠의 손을 잡아주지 못해서, 곁에 있어주지 못해 속상한 감정이 뒤섞였다. 영상통화 너머 아빠의 모습은 슬퍼보이기도 피곤해보이기도 하셨다. 어설픈 위로를 건내다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몇번이나 괜찮다고 하셨지만 나는 아빠를 제대로 위로해 주지 못했다.

며칠간 빈소에 계신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며 떠들썩한 장례식장이 주는 위로를 통화음 너머로 느끼기도 했다. 자식들의 자식들, 친지의 친지가 모여 건네는 위로의 시간. 함께 할 수 없어 나는 무척 속상했지만 아빠의, 작은 아빠들의, 고모들의 마음속 위로가 크길 기도하는 마음뿐이다.

'2022년 탄자니아, 잔지바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지바르 생활의 이모저모  (17) 2022.03.03
탄자니아 도착 생존신고  (12) 2022.01.12
Designed by CMSFacto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