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9. 11:33 2017년 한국
집에 왔다. 이상한 게 홀로 온 휴가가 끝을 향해 갈 수록 나는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어졌다. 집인데 나와 남편의 집은 아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는 남편이 있는 서울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누가 강제로 떼어놓은 것도 아니고 내 의지로 친정에 온건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아마 나는 이제 다른집 사람인가보다. 남편이 있는 곳이 내 집인.떨어져봐야 소중함을 안다고, 이번 휴가는 남편과 함께 있으려는 내 노력이, 내 의지가 옳았음을 확인시켜줬다. 부부는 함께 있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게 내 가치관이다. 이런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남편만 보내고 너는 여기서 경력을 쌓아라, 2년 떨어져 있는게 뭐 어떠냐, 지나고 나면 옳은 선택일 것이다 등등..
2017. 5. 4. 10:50 2017년 한국
친정에 내려와 소파와 한 몸이 된 지 일주일. 남편과 함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다. 정말이다. 캄보디아에서도 이렇게 시간이 많을 때가 있었다. 남편은 밖에 나가는 쪽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내 등을 떠밀어 줬다. 지금의 나는 말리는 사람도 없고 등 떠밀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시간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시간이 쏜살같이 내 몸을 관통해 흘러 지나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다. 쉬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닌 무의미가 지나간다. 나는 요즘 이렇게 소파에 누워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쉬지 않고 미드를 보고 있다. 요즘은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부터 정주행 중이다. 미국의 한 대형병원에서 인턴과정을 하는 5명의 외과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의사의 삶'..
2017. 4. 27. 19:27 2017년 한국
오랜만에 R을 만났다. R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다. 그때 R은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나중에 커서 초콜렛을 만드는 쇼콜라티에가 되고 싶다고 했다. R은 가끔씩 학원에서 직접 만든 수제 초콜렛이나 빵같은 것을 가져와서 친구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맛이 정말 좋았다. 내가 언젠가 매점에서 페스츄리 빵을 사 먹고 있으면 '거기에 설탕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면 아마 못 먹을 거다'고 R이 으스대던 것도 기억난다. (그 말은 내 빵 인생에 영향을 줬다. '페스츄리=설탕'이라는 공식으로.) 쇼콜라티에가 되고 싶다던 친구는 제과제빵은 적성에 안 맞다고 접은 지 오래고 지금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음료를 시켜 자리에 엉덩이가 닿자마자 R은 급히 입을 열었..
2017. 4. 25. 19:40 2017년 한국
나주에 있는 친정집에 잠시 가기로 했다. 작은 캐리어에는 며칠간 입을 옷과 책 몇 권을 담았다. 작년에 운 좋게 투고한 논문도 집에 꽂아 넣으려고 가져왔다. 엄마 보여드려야지, 하면서.날씨가 좋아서인지 집에 가는 마음도 가볍다. 버스를 타고 앉아선 점심으로 크림치즈를 덕지덕지 바른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럭저럭 맛이 괜찮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동안에 전부 먹어버렸다. 버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까지 8명. 평일 오전, 나주 가는 버스라 사람이 없으려나. 고속버스 한 채를 전부 전세 낸 느낌이다. 부자 된 느낌.3시간 50분쯤 지나니 나주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건 키 작은 건물들, 듬성듬성 서있는 아파트 사이로 솟아오른 산, 중학교 교복을 입고 떼 지어 다니는 아이들. 공간과 사람 사이..
2017. 4. 22. 23:34 2017년 한국
오늘 아주 오랜만에 음악치료사들이 많은 곳에 다녀왔어요. 전국음악치료사협회에서 학술포럼을 여는데 올해 교육 이수 시간도 채울 겸 다녀왔습니다. 음악치료사 자격을 따면 5년간 자격이 유지가 되는데 그 기간 이후 자격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5년안에 80시간의 교육을 들어야 해요. 5년간 80시간이니 1년엔 16시간, 그 중에 50%는 협회에서 주관하는 교육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니 꽤 복잡하죠. 올해 안에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이번 뿐인 것 같아 주제가 뭐든 보지도 않고 무조건 신청했습니다.뭐랄까. 학술대회같은 곳에 가는 것은 왠지 쑥스러워요. 저처럼 핀둥 핀둥 노는 치료사도 또 없겠죠.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노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새삼스럽게 큰 온도차이로 다가와요. 생기 넘치는..
2017. 4. 20. 10:32 2017년 한국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사람은 누구인지 아직까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수다를 떨려고 만났다가 불편한 질문만 잔뜩 받은 나 일지도, 혹은 '좋은 마음으로' 이것 저것 질문하다가 뜻하지 않게 내 예민함과 방어적인 태도에 불편했던 A 일지도. 내내 찝찝함과 불쾌함을 해결하지 못한채로 시간도 함께 흘러버렸고 감정만 남아 허공을 떠다니고 있다.'결혼하면 원래 그래?'를 질문하는 의도 자체는 선하고 순수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듣는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때 내 표정은 일그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가 어떤 '그래'에요"라고 되물었다. A는 '돌리지 않고 솔직히 얘기할게'로 운을 띄웠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결혼하더니 남편 가는데로 남편 하자는데로 휘둘리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결혼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