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6. 23:29 2017년 한국
대단한 날이었다. 남편의 마지막 아이엘츠 점수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 나왔고 내 첫 번째 번역 숙제는 공개적으로 수업 시간에 첨삭이 됐다. 우선 아침부터 얘기해볼까. 점수가 나오는 9시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긴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6.5가 나오면 좋겠다. 안 나오면 어떡하지 이런 류의 생각이 시계추 오고가듯 포물선을 그리며 반복됐다. 드디어 시간은 다가왔고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 있잖아. 점수가.... 더 떨어져서 나왔네?" 엥? 엥??? 이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답안지인데? 기존에 받은 점수보다 더 떨어졌다고?시무룩해진 남편을 수화기 너머로 느끼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전했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접고 통화를 끊고 생각했다. 인생이 뜻하는대..
2017. 5. 22. 09:00 2017년 한국
동대문서울문화역사 공원에서 열리는 서울아프리카축제에 다녀왔다. 아프리카 관련된 기관과 대사관이 마음을 모아 공동으로 주최한 것 같다. 말 그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는 한국 사람들을 위한 신나는 축제이자 문화 교류의 장이다. 매력적인 피부톤을 가진 이국사람들이 축제에 걸맞는 원색 패턴의 옷을 입고 축제의 공간을 거닐었다.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한국 청년들도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즐거운 표정을 지은채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교류하는 에너지가 눈으로 힘으로 느껴지는 시간이다.남편과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공연이 막 시작됐다. 젬베 연주가 마음을 두드리며 리듬을 거리에 퍼트렸다. 힘있게 젬베의 표면을 두드리는 연주자의 얼굴은 무척 몰입되어 보였다. 그가 만들어내는 리듬은 그 공간..
2017. 5. 21. 22:39 2017년 한국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영어는 어렵지 않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강사의 얼굴은 술취한 사람처럼 조금 벌겠다. "고등학교 졸업하는 수준이면 번역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요점은 한국어 입니다. 가장 적절하고 맥락에 맞는 한국어를 골라 넣는 것이 번역가가 하는 일이죠." 강사의 말에 따르면 번역은 정말 누구나, 마음만 있다면 (사전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처럼 들렸다. 번역에 필요한 기술이 몇가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 강의를 통해서 얻게 될 그 기술. 그것만 있다면 당장 책 한권이라도 뚝딱 번역해서 나올 것 같은 기세.언어는 어휘력이라고 했다. 고급언어와 평범어의 차이는 그가 구사하는 어휘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대통령이 쓰는 어휘..
2017. 5. 16. 23:32 2017년 한국
요즘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도교수님의 연구 프로젝트의 기획행정을 하는 업무이다.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왜 다시 학교에 기어들어갔는지 이해를 못할 것이다. 이건 마치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석사 논문을 쓰던 시절 정말 힘들었다. 나는 겁에 질려있었고 무능력을 매번 확인했고 자신감을 잃었다. 아주 안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졸업 후에 지도교수님의 연구실에 남아 세션을 계속하기도 했고 학회지 논문 투고까지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와 연이 닿아있었던 때보다 완전히 접고 나왔을 때의 기분이 너무 상쾌했던 터라. 이때 얼마나 스스로에게 학교로는 다시 돌아오지 말자고 다짐했던지.출국을 계획하는 7월 전까지 두 달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기도 애매한 기간이..
2017. 5. 13. 22:52 2017년 한국
허무하고 안타까운 영화. 를 보면서 유독 한숨이 많이 나왔던 것은 주인공 다니엘이 사회가 마음대로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실감나리만큼 공감됐기 때문이다. 심장병으로 일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다니엘은 의사의 권고로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하지만 질병 수당을 받는 점수에 조금 못미치는 결과가 나오자 구직 활동을 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당장 수입도 없고 수당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자 다니엘은 실업수당을 신청하는데 이것도 만만치가 않다. 종이에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인 할아버지 다니엘에게 인터넷으로 실업수당을 신청하라고 하지를 않나, 도움을 주기는 커녕 자꾸만 기다리라 규칙을 지켜라 따르라고만 다그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점점 넌덜머리가 날 즈음에 다니엘의 이웃 케이트는 급기야 ..
2017. 5. 10. 12:15 2017년 한국
아이엘츠 시험을 보는 남편을 기다리며 강남의 어느 큰 서점에 들어갔다. 수천권의 책이 읽혀지길 기다리는 그곳은 내게 평온의 장소였다. 시간만 허락하면 무한정 읽을 수도 있겠는데. 남편이 끝나기까지는 한시간 쯤 남았다. 내가 고른 책은 '에고라는 적'. 영어 원서로 하면 'Ego is the Enemy'. '에고'가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와닿지 않았던 것도 있고 왜 에고가 적이라고 표현하는지, 무엇에 적인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책의 첫번째 장을 넘겼다. 저자는 에고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이라고. 소위 자신감의 과한 버전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굉장한 사람이라고 믿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자만심을 경계하라, 겸손하라.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잘나보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