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인터라켄 4박5일 겨울여행 ★ 눈보라치는 융프라우 산맥에서

설탕가루 입혀진 인터라켄 마을

온 세상이 눈 세계다. 간밤에 내린 눈이 인터라켄의 작은 마을과 마을을 둘러싼 산맥에 가득히 쌓였다. 따뜻한 숙소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눈쌓인 마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경관이 있을까. 아주 연약한 나뭇가지 위에도 위태롭게 눈이 쌓여있다. 어제 썰매를 과하게 타서 그런지 일어나는게 심히 찌푸둥하긴 했지만 그것마저 개운한 아침, 신기한 아침이다. 

오늘은 어제 가보지 못했던 다른 산들을 가보기 위해 느즈막한 오전에 나왔다. 눈이 소복히 쌓인 거리를 사각사각 밟아가며 역으로 나가는 길. 간밤에 쌓인 눈이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손을 뻗어 주먹크기로 주물 거려봤다. 소복한 눈이 금방 뭉쳐져 단단해진다. 금새 꼬맹이로 돌아간 느낌이다.

푸르른 소나무에 눈이 설탕가루처럼 앙증맞게 덮혀있다. 잎을 흔들면 금방이라도 쏟아져버릴 것 같은 모습. 신선하다. 방금 하늘에서 쏟아진 눈이 산맥을 한겹 덮고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적어보고 싶은데 본 것을 적는다는게 이렇게 어렵다. 이 장관을 어떤 말로 담을 수 있을까. 

인터라켄 Ost역 바로 옆에 있는 강가. 비현실적인 눈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눈이 잘 뭉쳐져서 금방 눈사람이 만들어진다. 나의 울라프. :)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간 스키어들

물가 비싼 스위스. 일생 중에 인터라켄을 보러 오는 경험 자체도 쉽지 않은데 그 와중에 날씨까지 좋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는 더없이 아름다운 융프라우를 보고 누군가는 구름에 쌓인 융프라우를 보고 간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해가 반짝거리는 설산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운좋은 사람들을 부러워 하는 꼴이다.

그런데 여행 3일차. 눈보라치는 융프라우 산맥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날씨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스키를 즐기고 있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무엇을 믿고 뛰어들 수 있는지. 우리와 함께 멘리헨에 도착한 스키어들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으로 하나 둘씩 뛰어들어갔다. 그 사람들의 형상은 하나 둘씩 허연 눈안개 사이로 사라져갔다. 내 눈에는 꼭 죽으러 뛰어들어가는 모습으로 보였다. 덩치 큰 어른들 사이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꼬마들도 겁없이 서 있었는데, 부모들은 아무런 호들갑없이 의례 있는 일이라는 듯 조그만 아이들과 함께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아들을 단장시켜주는 엄마.

이 눈보라 속에 사람들이 내려가고 있다.

나 같았으면 완벽한 하루, 완벽한 날씨 속에서 꼭 보아야 할 궁극의 경치를 보는 것이 완벽한 여행의 조건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남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융프라우의 모습을 봐야만 괜찮은 여행이 되는 것이다. 멋진 경치를 찍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몇십번 눌러서 한 장이라도 건지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는 그런 여행.

그런데 내가 멘리헨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달랐다. 있는 그대로 즐기면 그게 전부인 여행의 모습을 나는 보고 또 경험한 것이다. 눈보라가 치면 치는대로 날씨가 험상궂으면 그런데로 융프라우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 나는 이 모습에서 인생을 연상하게 됐다. 랜덤으로 배정되는 날씨 속에서도 나름의 부분을 최대한 즐기며 그 시간을 보내는 것..

멘리헨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길에서 뜻밖의 조난경험.

공중에 떠있는거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스키어들은 줄을 잡고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용케도 걸어온 길.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삶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 문구가 떠오른다. 그 누가 봐도 완벽한 인생, 평범하고 안락한 인생을 사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감옥에 가둬 놓고 사는 것은 흐린 날씨를 한탄하며 인터라켄에 와서도 불평만 늘어놓는 모습과 같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조건대로 나름의 부분을 즐기면 되는 거다. 그 뿐이다.

서른 살이 코 앞에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10년을 살아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내게 '부족한 것'에 집착하면서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직장을 갖지 못한 일이나 자아실현과 돈벌이 둘 다를 실현시킬 전공을 이런 나이에 선택하지 못한 스스로를 한탄 했었다. 내게 가고싶었던 길에 이미 들어선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가장 중요한 지금, 현재의 즐거움과 환희를 만끽하지 못한 적이 많았으니. 날씨 탓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며 여행을 여행답지 않게 만든 요인은 바로 나다.

서른 이후 앞으로 펼쳐지는 인생에서는 주어진 삶 자체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 폭풍이 몰아치고 날씨가 좋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는 배짱을 갖고 싶다. 누구는 좋겠다, 누구는 부럽다 말하지 않고 나 나름의 순간을 즐기며 살고 싶다. 내가 신나서 몰입하는 일을 마음껏 즐기면서.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지난 나를 되돌아보고 앞으로를 다짐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미친듯이 웃고 즐기며 썰매를 탔던 경험과, 눈보라 속으로 몸을 맡기고 사라져간 스키어들을 기억해야지. 그 두가지를 이번 여행에서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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