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로 울적한 마음, 비에 씻겨 내려가다

분명히 잘 안됐었다. 몇장 프린터를 하려고 하면 자꾸만 종이가 프린터 틈사이로 끼고 여러장이 한꺼번에 올라오는거다. 종이를 한장씩만 들어올려야 하는데 그 부품이 문제인것 같았다. 프린터에서 날 수 없는 굉음이 들리기 시작하면 그날 프린터는 제 일을 다 마감했다고 알려주는거나 다름없다. 영업 종료. 수차례 프린터 덮개를 열어보고 살펴보고 해도 문을 닫아버린 프린터는 다시 영업개시를 하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 종이가 끼고 말썽이 많길래 결국 프린터를 샀던 업체 아저씨를 불렀다. 오후쯤인가, 뾰족한 마법구두를 신은 아저씨가 사무실에 방문했다. 직원들은 말없이 자리를 뜬다. 나보고 아저씨랑 직접 얘기하라는 뜻이다.

"종이가 자꾸 껴요." 나의 짧은 영어 설명을 듣고 아저씨는 나보고 프린트를 해보라고 했다. 몇장 눌러놓고 봤는데, 아니 왜 이게 잘 나오는거야? 아니? 이러면 안되는거잖아? 당황스럽기 시작한다. 몇번 연달아 해봤는데 정말 다행히도 흔하게 겪었던 종이걸림 현상이 나타났다. 내 얼굴에 퍼지는 의기양양함. 거봐요. 안돼죠? 이것 때문에 내가 고생했단 말입니다.

아저씨는 프린터 속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 같았다. 종이를 흡수하는 조그만한 롤도 손가락으로 만질만질.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말았다가. 그리고선 하는말이, "1번 용지함이 문제네요." 엥? 아저씨. 방금 종이걸린데는 2번 용지함인데? 몸짓 발짓 섞어가면서 설명을 하니까, 아 이제는 두번째 용지함이 문제라고 한다. 그러니 두번째 용지함은 큰 종이만 출력할때 쓰고 평상시에는 첫번째를 쓰라고.

속시원하게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자꾸 이 아저씨는 "문제 없어요"를 반복한다. 급기야 지켜보고 있던 직원도 자기 컴퓨터에서 출력할때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덧붙인다. 왜 나만 문제인가. 왜 내 컴퓨터에서만 용지가 자꾸 걸리는건데? 울적해졌다. 아저씨가 온 것이 도움이 안됐다.

프린터도 사람 가리나. 서러움이 폭발한다. 조금만 더 감정을 끌어 올리면 눈물도 나올것 같았는데. 그무렵 하늘이 잔뜩 울상이더니 폭포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스테인레스 지붕을 두드린다. 빗소리가 온 공간을 다 가득 채워버렸다. 빗소리가 내 마음도 내 생각도 다 채워버렸다. 올라오던 감정은 비에 씻겨 내려가버렸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 이 비가 만들어내는 광대한 소음은 카메라에 담을수가 없구나.

쏟아지는 비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씻겨 내리는 물의 어마어마한 힘에 압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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