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상황을, 나를 알아차리는 연습

요즘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도교수님의 연구 프로젝트의 기획행정을 하는 업무이다.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왜 다시 학교에 기어들어갔는지 이해를 못할 것이다. 이건 마치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석사 논문을 쓰던 시절 정말 힘들었다. 나는 겁에 질려있었고 무능력을 매번 확인했고 자신감을 잃었다. 아주 안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졸업 후에 지도교수님의 연구실에 남아 세션을 계속하기도 했고 학회지 논문 투고까지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와 연이 닿아있었던 때보다 완전히 접고 나왔을 때의 기분이 너무 상쾌했던 터라. 이때 얼마나 스스로에게 학교로는 다시 돌아오지 말자고 다짐했던지.

출국을 계획하는 7월 전까지 두 달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기도 애매한 기간이라 이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두 달 정도야 뭐 괜찮겠지. 사람이 모름지기 제 밥 벌어먹는 일은 해야하니. 가장 큰 동기는 돈이었고 두 번째는 이 연구 프로젝트가 심리치료 지원 사업이라 그 쪽으로 좀 배워볼까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부터 뭔가 얽매여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계속 왠지 이 일을 생각하게 된다. 사로잡혀 있다. 정해진 일을 하면 되는 그런 쉬운 일이지만 반대로 다가올 일을 바라봐야하는 중압감이 상당하다. 말하자면, 이것도 해야하고 곧 저것도 해야하고. 이건 딱 오늘 안에 끝내야 다음에 올 것에 지장이 없고, 이런 식이다.

다음주 일을 미리 걱정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지만 나는 자꾸 앞당겨 걱정하려고 해서 문제다. 다음주 수요일에 수퍼바이저 회의를 잘 열 수 있을까. 연구비 카드 신청한 것이 제때 안나와서 돈을 못쓰게되면 어떡할까. 수퍼바이저 교수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안 하고 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을까. 2주 뒤에 워크숍 준비는 잘 할 수 있을까. 강사 섭외며 장소 섭외며 현수막이며 배너며 잘 만들 수 있을까. 밥을 줘야할까 간식을 줘야할까 하는 것들.

갑자기 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받을 때도 있다. 너무 당황스럽다. 머리가 하얘지고 호흡이 빨라진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 문제에 순간 쑥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빠져버린다. 

오늘 오전에는 사정상 단축근무를 한다고 교수님께 말씀드리고 남편과 어디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 때문에 가는 내내 핸드폰에 코를 박고 일을 처리한거다. 10시 반쯤 그 일이 터져서 거의 한시간 내내. 공문 내용쓰고, 자격증 협회 쪽하고 의논하고, 수퍼바이저 회의 일정 확정해서 메일쓰고, 식당 예약하고, 연구처에 전화로 연구등록 문의하고. 정말 말도 안되는 양의 일을 (걸어가면서)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글만 읽으면 힘드니까 관련없는 사진 투척. 오늘 저녁에 식구들과 간 'mo better blues coffes & music' 카페


하루가 다 간 지금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건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꼭 오전에 그걸 했어야 했을까? 오후에 연구소에 들어와서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처리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급하고 '당장 처리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돌아보건데 내가 너무 여유롭지 못했다. 성급했고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부산스러웠고 소란스러웠다. 내 모습이 그랬다.

한 발자국 물러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나 지금 조금 급하다'라던지 '여기서 심호흡 좀 하고 한 템포 여유롭게 가야겠다'같은 생각을 하고싶다. 유체이탈을 한 듯이 꽉막혀 보이는 상황에서 잠시 떨어져 제3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다.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 그 순간 뭔가를 알아차리는 연습. 

지금 이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내 행동을 돌이켜보는 것도 '알아차림'의 과정이다. 알아차릴만한 '나의 어떤 약한점'이 있기에, 평소보다 힘든 상황이라서, 좀더 경계선을 (한계를) 나가려는 중이라서, 그런 과정 중에 있기에 이런 '알아차림' 연습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쉽지만은 않은 근무지만 내게 주어진 두달간의 시간을 아쉽지 않게 보내겠다. 나 하기에 달렸다. 이것을 훈련으로, 수련의 시간으로 여기겠다. 몸가짐이나 인격, 태도나 자세를 다듬는 시간으로 삼겠다. 오늘 내가 글로 쓴 작업처럼. 내가 느낀 감정과 자동적으로 나오는 행동 패턴,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과한 것들을 포착해보겠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두고 보고 가까이 두고 살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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