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산 분유를 먹은 아기의 사연

독일에서 아기를 키우다 응급상황이 생기면? 곧바로 응급실로!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아침에 잠이 덜 깬 나는 하니를 남편에게 맡기고 쪽잠을 자고 있었다. 남편은 하니와 조금 놀아주다가 배가 고파하는 것 같아서 분유를 타 왔다. 

하니는 유난히 분유를 잘 먹지 않았다. 원래 보통 물려주면 절반까지는 단숨에 마시는 아이인데 몇 모금 먹고 떫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온도가 너무 뜨거운가?" 남편이 의아해하길래 잠결에 나는 분유를 만져봤고 온도는 별로 뜨겁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 젖병을 물렸지만 하니는 잘 먹지 않았다. 

여기까지면 별 다를 것 없는 평온한 상황일 것이다. 하니는 분유를 잘 먹기도 하지만 잘 안 먹기도 하니까. 아기가 잘 먹지 않는 데에 별 의문이 없었다. 하니는 20ml를 겨우 먹고 남편의 품에 안겨 놀다가 8시쯤 됐을 때 내가 다시 젖병을 물려 40ml 정도를 더 먹었다.

 


 

잠에 들은 하니를 확인하고 우리도 아침식사를 먹기 위해 준비했다. 어제 쪄놓은 고구마와 씻어놓은 납짝복숭아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내가 마실 아몬드유도 한 잔 따라두었다. 남편은 아침에 항상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준비가 조금 더 걸린다. 나는 다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어제 읽다가 만 책을 읽기 위해 e북 리더기를 펼쳤다.

고요한 아침을 단숨에 깨버린 건 남편의 외마디 비명 소리였다.

"악!! 어떡하지! 여보... 큰일났다!"

남편은 얼어붙은 듯 부엌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엌에서 나와 거실에 모습을 드러낸 남편의 표정은 흡사 유리병이라도 깨어버린 가엾은 소년의 모습이었다. 나는 바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어제 전기포트에 칼크를 없애려고 구연산을 넣고 끓였는데.... 깜빡하고 물을 안 버리고 놔뒀는데.... 오늘 아침에 그 물로 하니 분유를 타 줘버렸어...."

 

갑자기 세상이 두두둥!!! 천둥번개가 치는 느낌이었다. 내 머릿속 회로는 재빨리 '구연산=산=산은 위험해=하니는 아직 어려=하니의 식도와 위가 위험해'로 연결되었다. 우리 둘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나는 괴로움에 소리쳤다. 하니는 곤히 자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 구연산 분유를 먹은 지 30분, 기껏해야 1시간이 지났다. 나는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하니의 식도가 녹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준비를 하고 하니를 깨웠다. 소아과부터 가자. 당장. 젖병 챙기고.

 

문제의 구연산. Amazon에서 대량 주문해서 쓰고 있는 녀석이다.

 

병원에 갈 때는 꼭 문제의 원인, 분유를 챙겨가기!

독일의 소아과는 항상 전화를 받는 게 아니다. 하니가 다니는 동네 소아과는 그렇다. 전화를 받는 요일과 시간대가 제한적이다. 상담시간 외에 전화를 할 경우에는 신호 자체가 가지 않는다. 이른 아침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어떡하지. 남편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결정은 나의 몫. 소아과는 8시에 문을 연다. 일단 찾아가 보자! 자는 하니를 깨워 분유를 챙기고 집 밖으로 나섰다. 

상기된 표정으로 소아과를 가는 내내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쓰나미처럼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남편은 아까부터 계속 자책 중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화가 목 끝까지 치밀어올랐지만 아까부터 꾹꾹 누르고 있던 참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입술을 깨물었다.

소아과에 접수 간호원은 상황을 듣더니 자기네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인근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카시트 같은 것도 없이 하니를 무릎에 앉히고 당장 병원으로 향했다. 소아병동 응급실에 도착해서 급히 상황설명을 하고 가져온 젖병과 Amazon에서 미리 검색해둔 구연산 출처를 보여줬다.

 


 

간호사는 하니의 체온과 혈압을 쟀고 심장소리도 듣고 전반적인 상태를 확인했다. 하니는 가만히 누워 이것저것 검사를 받는 동안 아주 평온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줬다. 

독일에서는 이런 응급 상황의 경우 전화로 물어볼 수 있는 중앙 센터가 있는 모양이다. 소아과 의사는 우리에게 그곳에 전화를 해봤느냐고 물어봤다.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고 하니, 의사가 이런저런 구체적인 정황을 가지고 센터에 물어보겠다고 나섰다.

하니의 안정된 표정과, 일단 병원에 잘 도착하여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의사에게 맡겼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게 미안한지 어쩔 줄 몰라했다. "절대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의사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아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아무 이상 없을 겁니다." 의사 본인도 놀란 눈치였다. 아기에게는 다소 높은 산이었기에, (남편의 말로는 300ml 정도 되는 물에 티스푼으로 1-2t의 구연산을 부었다고 한다. 가져간 분유의 pH는 5가 나왔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했던 의사였다. 피검사 결과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비로소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하니를 끌어안고 볼에 키스세례를 퍼부어주었다. 하니가 태어나고 겪은 첫 번째 큰 일이었기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될 것 같다. 

 

구연산 분유를 먹은 그다음 날...

아무일도 없는 것 처럼 평온하게 잠든 하니.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하니는 다음날 배앓이를 유독 크게 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산'이 아닌가. 하루를 오후 내내 끙끙거리고 칭얼거리더니 평소와는 다른, 하얀 알갱이 같은 게 있는 변을 한번 보고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산이 단백질과 만나면 응고가 되니, 아마 뱃속에 있던 분유 단백질과 구연산이 만나 응고가 된 작품(?)들이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보다 더 큰 일들이 부지기수겠지만 이번처럼 심장이 떨리고 두렵고 또 걱정됐던 이 감정 동요는 다시 겪고 싶지 않다. 더욱더 아기를 돌보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큰 일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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