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아기가 열이 났을 때

잘 노는 하니가 느닷없이 열이 났다. 콧물이나 기침 같은 감기 증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유독 축 쳐져 보였다. 하니가 평소와 다르게 뭔가 더 뜨끈뜨끈했다. 설마... 온도를 재보니 38.8도. 비접촉식 온도계로 이마를 대고 잰 거라 혹시 부정확한 수치일까 싶어 항문 온도로 다시 재보았다. 38.1도.... 숫자 올라가는 속도가 꽤 빨랐다.

간담이 서늘했다. 하니가 태어나고 열이 난 것은 처음이다. 초보 엄마는 심히 당황했다. 뭘 어떻게 해줘야 할까, 바로 약을 줘야 할까 조금 지켜봐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38도 가지고 병원은 안 되겠지. 여긴 독일이니까. 웬만큼 열이 나지 않고선 태연하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소아과 의사가 대부분인 이곳은 엄마들에게 악명이 높은 곳이다.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열은 주일 내내 오르락 내리락 하더니 주일 저녁 39.3도를 정점으로 찍었다. 저녁 9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나는 쌕쌕거리며 잠을 청하는 하니를 가슴 위에 올려두고 다소간 멍한 상태가 되었다. 집에는 파라세타몰 계열의 좌약식 해열제가 있었다. 하니가 예방접종을 받을 때 소아과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이다. 약을 지금 쓸까. 독일에서는 소위 39.5도가 넘어야 약을 쓴다던데 조금 더 지켜봐도 될까.

갑자기 예전에 AOK Hotline für Kindergesundheit 번호를 저장해두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무작정 전화를 걸어보았다. 상황을 설명하고, 집에 가지고 있는 약을 써도 될지를 묻는 내 질문에 상담 직원은 116117을 걸어보라고 했다. 곧장 116117을 걸어 다시 한번 상황을 설명하니, 이번에는 올가 병원에 가라고 한다. 나는 하니의 현재 상태와 약에 대한 의학적 소견이 궁금했던 건데... 내가 지금 아픈 아이를 두고 뭘 하고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막막함이 밀려들어온다.

해열제를 쓰기 전 항문 온도를 다시 재 보았다. 38.8도. 이것도 위험한 수치일 수 있지만, 30분 전보다 조금은 내렸다. 하니는 잘 자는 듯 보였다. 잘 싸워 이기고 있는 우리 아기를 나는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품에 안은 하니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윽고 아침이 밝았고, 하니의 몸은 바이러스와 잘 싸워 이긴 듯 보였다. 울지도 않고, 아주 상큼한 목소리로 우리의 아침을 깨웠다.

37.8~38.4도 (열이라고 할 수 없는)에도 행복하게 노는 하니

약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믿음을 준 것은 하니였다. 열이 있었던 이틀 내내 하니는 놀랍게도 잘 먹었고 잘 놀기까지 했다. 미열인데 만약 아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다면 고민없이 바로 썼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것도 어쩌면 고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니는 다행히 잠을 잘 자고 열을 이겨내 아침을 맞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엄마의 망설임으로 하니가 더 힘들었으면 어떡하지. 해열제를 쓰지 않아서 하니가 더 힘들었으면 어떡하지. 처음이라 더 당황스럽고 복잡했다. 훗날 엄마의 감이란 것이 생긴다면 조금은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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