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영어로 말해야하는 피곤함에 대하여

겪어본 사람만 안다는 그 어색함

어젯밤 웰커밍 파티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독일어 집중 강좌가 시작됐다. 남편의 학교에서 외국학생들을 대상으로 방학기간 동안 집중강좌를 연다고 하길래 나도 남편과 함께 신청했었다. 아직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어학원 정보도 잘 몰랐기도 했고 대충 보아하니 9월 말이나 10월 중순부터 새로운 어학 코스가 시작되는 것 같길래 노느니 뭐하나 싶어 9월 첫주부터 시작하는 이 과정에 등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하하. 호헨하임 학교 학생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과정 자체가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거나 석사 혹은 박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몇 가지 안 되는 중요한 대화 거리 중에 하나가 전공 이야기다. 다들 경제나 경영, 농업관련된 전공을 읊고 나를 쳐다보는데, "난 이 학교 학생 아니야. 난 그냥 어학 공부하러 왔어."라고 얘기하면 어쩐지 술술 풀리던 대화도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어쨌든. 아주 오랜시간 사회적인 활동을 안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스위치가 강제적으로 켜진 것 같다. 외국애들 틈바구니에 껴서 웰커밍 파티라니. 어색해 죽을 뻔 했다.

피곤함이 떠난 고요한 평화. (둘만 있을때 찾아오는 ...평화)


질문은 정해져있다. 넌 대답만 해라.

이번 독일어 집중강좌에 등록한 학생 수는 70명 정도. 전 세계의 33개국에서 왔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남편과 내가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시작하기 전까지 너무 어색해서 괜히 앞에 높여있는 땅콩만 잔뜩 씹어먹었다. 우리 다음으로 온 여자애는 핀란드에서 온 교환학생. 전공은 뭐냐, 언제 독일에 왔냐,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냐, 독일이랑 핀란드는 분위기가 좀 같냐, 이런 저런 얘기를 아끼지않고 하다보니 화제거리가 뚝 떨어져버렸다. 다행히 노르웨이에서 온 다른 여자애가 옆에 앉아준다. 같은 질문을 똑같이 물어보고 비슷한 대답이 오고간다. 70명을 앉혀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지. 강제 소셜활동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룹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서 아주 신나게 음주에 충실하고 있는데, 우리 테이블은 이미 소재가 바닥났다. 어색한 침묵만 공기속에 가득하다가 때마침 코디네이터가 마이크를 잡는데 어찌나 고맙던지. (휴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게 나뿐만은 아니었을거라고 확신한다. 다들 눈빛에서 안도하는 거 내가 느꼈다고.

어제는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환경에 노출되는게 정말 오랜만이라 긴장했던 건지 모르겠다. 영어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미팅 아닌 미팅이라니. 이거 정말 골치아프다. 코디네이터는 독일어로 속사포 랩처럼 설명을 쏟아내는데 우리는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눈치 싸움 시작이다. 

Seriously? Are you kidding me?

겨우 겨우 웰커밍 파티가 마무리되고 우리 둘이 거의 일등으로 건물 밖을 나온 것 같다. 집에 가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인것 처럼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맥주병을 집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뒤로 하면서 "너넨 아직 젊구나"하고 알아듣지 못할 우리나라 말을 내뱉는다. 절대 쑥스러워서 먼저 나가는거 아니다. 언니 지금 피곤해서 그래. 사실 끝나서 다행이라고, 남편과 위로의 말을 건낸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집 까지는 버스타고 35분, 우반타고 5분정도 걸린다. 이제부터 넉넉히 1시간 뒤면 집에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아직까지 건물밖을 나온 사람은 우리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려니 하면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어떤 키큰 여자가 버스정류장에 오더니 표지판을 읽기 시작한다. 우리가 왔던 쪽에서 나온 것 같은데. 학생인가 싶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 왈, 여기가 지금 공사 중이라 버스가 안 선다고 한다. 구글지도 상으로는 이제 2분 뒤면 버스가 온다고 하는데. 역시나 기다리던 버스는 애처롭게 손짓하는 나를 무시하고 보기좋게 슝 지나가버린다.

알고보니 그 여자는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이었다. 아무튼 버스가 안 온다니 우반 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우리 셋이서 10분이나 걸어야 하는 U반 역까지 가는 것도 어색한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집도 우리집과 정류장 하나 차이??? 고로 1시간 동안 쭉 같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 지금 이것보다 큰일은 없다. 

지금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대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다. ㅠ

이미 우반 역까지 가는 동안 우리 소개는 다 한 것 같고 슈투트가르트에서 겨울나기에 대해서 한참 떠들어대기 까지 했다. 소재 떨어질까싶어 겨울나기 대비를 위해서 우리가 샀던 물품들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소개했다. 좋았어. 이대로 가면 괜찮을거야. 잠시 안도를 했다.

그것도 잠시. 신나게 (주제파악 진심 못하고) 떠들어대다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하는 참사가 벌어진거다. 우리가 늘 환승하던 곳은 이미 훌쩍 지나버리고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님 지금 장난해? 이미 시간은 10시를 넘었다. 건물 밖을 나온지 1시간이 지났다.

그때부터. 급격하게 쏟아지는 피로와 실망감이 우리 셋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분이 넘는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중앙역까지 우리는 함께 열차를 타고 왔다. 아, 참고로 독일 열차는 넷이서 마주보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그 여자는 마주보고 앉았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피하며 각자의 피로에 잠겼다. 


수없이 많을 어색한 날들의 저녁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낯선 땅 독일에서 영어 독어 섞어가며 살아가야하는 우리 부부의 어색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오늘 밤은 그 수없이 많은 어색한 날들 중의 하루. 이 얼마나 기대되는 이야기인가. 하하하. 하루 이틀 지나다보면 나아질 (그렇게 되길 매우 희망하는) 이야기. 기대하시라. 개봉박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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