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심란 해질 때면 나는 주로 주변을 정리하거나 더이상 쓰지 않는 물건들을 버리는 것으로 착잡한 감정을 해결하는 편이다. 며칠 전에는 책장을 정리했다. 지인에게 기증받은 하얀 책장에는 어느덧 독일 생활 1년 반의 흔적들이 책과 종이, 파일들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다 읽어버린 책과 1년 반이나 두고도 쓰지 않은 지난 세입자가 놓고 간 낡은 수첩들, 작년 한해 독일어 어학원을 다니면서 한때 열심히 외웠던 단어 카드, 온갖 유인물 종이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버리기로 작정하고 빼 놨는데, 아니야, 언젠가는 다시 한번쯤 들춰보겠지 하고 도로 책장에 들어간 운 좋은 책들도 있었다. 전 세입자가 놓고 간 책들이다. 한글로 된 독일 여행책자, 독일 미술관에 대한 책, 독일에 대한 책들이다. 그동안 안 읽었으면 앞으로도 책장에 박혀 있을 확률이 매우 높을텐데도 '언젠가는 써먹겠지'하는 이 마음 때문에 버리질 못하고 도로 꽂아두었다. 심지어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산 것도 아닌데도 아까워서 못 버리는 이 심리.

손떼묻은 독일어 교본들은 그냥 두기로 했다. 더이상 펼쳐보지도 않고 내 주의를 끌만큼 매력적인 내용도 없는데도 열심히 듣고 배웠던 추억이 담긴 것들이라 그냥 이런 저런 애정없는 책들처럼 내버리기가 아쉽다. 나중에 이사를 해야 한다면 그때 가져가게 될 책은 독독사전 한권 뿐이겠지만 그 전까지 책장 한켠을 차지하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잘못 산 책들도 못 버리겠다. 내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한 나머지 작년 독일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독일어로 된 얇은 소설 두권을 사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 책들은 여전히 첫 페이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할인가로 산 것들이라 저렴하게 사긴 했지만 내돈 주고 산 책들은 버리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두권이 아직 책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버린 것들은 이제 손을 더이상 타지 않는 잡지들, 한번 읽은 소설책들, 학원 수업때 받은 유인물들이다. 단어카드는 꽤 양이 방대했는데 옛정을 생각해서 한 번씩 읽어주고는 여전히 그 뜻을 외우지 못한 카드들만 따로 추렸다. 1/5 정도로 확 줄었는데 다음번 정리 때까지 자리만 차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엄습해서 찔리는 마음에 단어카드를 힐끗 쳐다봤다.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애정이 분산되는 느낌이 든다. 물건에도 애정을 기울어야 자주 들춰보게 되는데 물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독독사전을 작년 1월에 샀을 때만 해도 굉장히 흥분되고 기뻐서 한 동안 자주 펼쳐봤었다. 사전을 펼쳐서 종이를 넘기는 느낌이 참 좋았다. 하지만 점차 다른 물건들이 내 삶에 들어오면서 독독사전은 또 책장 한켠을 우두커니 차지하고 있는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우선순위에 밀린 독독사전. 사실 독일어 교제 중 내가 가장 애정하는 아이템인데도 불구하고..

과감히 덜어낼 줄 아는 것도 가끔씩은 필요한 듯 하다. 그래야 나에게 소중한 것들에 더 깊은 애정을 쏟을 수 있다. 선택과 집중. 막연하게 '언젠간 쓰겠지'하고 기약없이 남겨두는 것은 모든 것을 산만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 세입자가 놓고 간 책들과 더이상 내 흥미를 끌지 않는 독일어 소설책 두권은 보내줘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버리는건 쉬우면서도 참 어렵다. 하나하나 남겨놓느냐 버리느냐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과정이 괴로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괴로움은 나만 가져가는게 좋겠다. 남편에게는 비밀이다. (못 버리게 할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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