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읽은 대하소설 <토지>, 21권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대하소설 <토지> 대장정 마지막 장을 넘겼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온몸엔 전율이 흘렀다. 나또한 광복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애환을 고스란히 읽고 또 공감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이 그러했듯, 해방으로만 해결되는 <토지>의 결말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결말을 오늘 보았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끝)

나남출판사,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전21권 (출처: 구글이미지)

  고 박경리 작가의 장편소설 <토지>는 이번이 두번째이다. 첫번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언어영역 공부는 책읽기로 하겠다는 나름의 신념으로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장길산>, <임꺽정>같은 장편소설을 걸신들린듯 읽어대던 때였다. 학교와 집을 반복해서 오가는게 전부인 일상속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시험공부에 지칠때면, 휴식처럼 짧지만 강렬하게 주어진 독서시간. 그 짧은 시간동안 스무권이 훌쩍 넘는 <토지>를 소화하기엔 버겁기도 했다. 사고력도 좁았고 시대를 이해하는 배경도 얕았던 그때, 나는 어쩌면 권수가 올라가는 재미에 1년이나 책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대학과 대학원도 졸업하고, 어느덧 결혼을 해 한 가정을 이루고, 소소한 실패와 굴곡을 겪으면서 나라는 사람은 조금 다른 존재로 변모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같은 책인데도 그 책을 마주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리보인다고, 두번째 읽는 <토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수없이 쏟아져 등장하는 인물들의 애환에 조금 가깝게 다가갔음은 물론이며 인물들 뒤에서 원고지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작가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지기도 했다. 책장이 넘어가는 재미가 예전보다 몇배는 더 있었다. 권수가 올라가는게 아쉽기만 했다.

  21권의 <토지>를 읽으면서 인상깊은 점들이 있다. 먼저는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그들 모두가 주인공인것처럼 진정성있는 이야깃거리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소설의 핵심을 뚫고 있는 평사리의 최참판댁, 하나밖에 남지 않은 여식 최서희, 서희의 할머니 윤씨부인, 최치수, 별당아씨와 구천이 김환의 사랑, 귀녀와 강포수, 길상과 봉순이, 두만네, 석이네, 용이와 월선, 강청댁과 임이네, 환국과 윤국이, 양현이와 영광, 명희, 조찬하, 오가다와 연실, 소지감, 해도사, 김장사, 몽치 등... 이 페이지에 모두 언급하기조차 힘든 수없이 많은 인물이 각자의 서로다른 사연을 가지고 등장한다. 

   시대의 지식인들과 독립운동가, 그들의 어머니 혹은 부인, 할머니 등 여인들의 이야기. 한명 한명의 인생이 담겨져 있으면서 시대상이 잘 풀어져 있다. 인물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때도, 영광스러운 삶을 살때도 소설은 덤덤히 인생행로를 따라가며 비춘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양한 모습의 삶을 가감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보고 있노라면 나의 이 순간도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잠긴다. 한때는 찬란하게 독립운동에 삶을 바쳤던 이들도 세월이 흐르고 세상풍파에 시들해지기도 하고,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슬픔같은 감정도 세월에 켜켜이 무뎌진다. 쓸쓸하기도 했지만 여러 인생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참 좋았다.

   두번째로는 수많은 공간에서 오고가는 대화이다. 소설속 인물들은 만나면 어느 공간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끼리 거실이나 서재, 요릿집이나 기찻간에서. 아낙들은 아낙들 나름대로 부엌이나 시냇가, 시장에서. 학생들은 학생들끼리 기숙사나 교실에서. 인물과 공간을 아우르는 작가의 범위가 범위계층을 초월하고 연령을 막론하여 독자로서 그 대화를 엿듣는 재미가 컸다. 작가가 설정한 공간을, 예를 들어 만주 한복판 어느 중국집이라던지, 햇볕이 반짝이는 시냇가라던지, 그 이미지를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사실 그 대화의 깊이도 상당하다. 작가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주지 않았나싶다.

   한사람이 세상에서 태어나 할수 있는 일의 범위는 각각 다를 것이다. 누군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을 때 누구는 자기 집앞 텃밭에 고추를 키우다 갈 것이다. 박경리 작가는 한국 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는데 나뿐만 아니라 많은 평론가들이 동의할 것이다. <토지>는 한권의 책이나 수십개, 수백개의 이야기, 다른 소설들로 쪼개지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은 불행의 편이고, 문학은 끊임없는 단련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불행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25년이라는 시간동안 토지를 연재하면서 시대적 고통과 암이라는 개인적 고통을 온전히 끌어안으며 <토지>를 써내려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작가의 문학적 운명을 떠올려본다. '문학보다는 삶이 우선'이라는 작가의 말을 마음에 새기면서, 수많은 인생, 생명에 대한 연민이 결국 작가가 <토지>를 통해 하고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Designed by CMSFactory.NET